현대예술의 위기가 거론되고 있다. 특히 미술계를 중심으로 불어닥친 예술위기론은 예술의 비판적 사회참여로서의 기능이 말소된 현대예술의 양상을 두고 '예술은 죽었다'고 말한다. 이에 중대신문 문화부는 현대예술의 위기에 대한 성찰과 함께 예술의 의미에 대해 다시한번 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1)현대미술에 대한 반성적 사유 (2)대중매체와 욕망 (3)예술적 실천, 그 대항과 전복정신

우리는 지금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대를 맞기 직전에 있다. 천년에 한번 맞이하는 역사적 순간이니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 시대를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밀레니엄을 숫자 개념으로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지난 밀레니엄의 시작이 중세시대에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엄청난 시간적 격차를 실감하게 된다.

흔히 암흑시대(Dark Age)로 기억하는 중세는 그러나 5백년에서 1천5백년에 이르는 전체 시기가 다 어두웠던 것은 아니고 오직 초기 부분이 암흑기에 해당할 뿐이다.

그래서 젠슨(H. W. Janson)같은 저명한 미술학자는 이 시기를 가리켜 ‘암흑의 시대’로 부르기 보다는 ‘신앙의 시대’로 부를 것은 제안했던 것이다. 명칭이야 어찌됐던 중세는 철저한 신 중심의 사회였다. 곳곳에 성당과 수도원이 세워지고 익명의 장인들과 수도승들에 의해 수많은 필사본이 제작되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의지가 담긴 로마네스크 양식을 낀 대부분의 성당들이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의 위용을 갖추었다.

중세 건축양식은 종교의 권위주의적인 문화의 소산이다

중세시대에 ‘위기(crisis)'가 찾아온 것은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될 무렵인 10세기 말엽이었다. 독일의 저명한 미술사가 아놀드 하우저에 의하면, 끌뤼니(Cluny)수도원에서 비롯된 개혁운동에 의해 ‘새로운 정신주의적 경향과 지적 경직성이 대두’되면서 교회중심의 절대주의적 문화정책이 실현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절대주의 내지는 권위주의적인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 한껏 오만해진 승려들이 전체주의 목적을 추구하면서 묵시록적인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세계의 종말을 외쳐댔던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황제나 왕을 파문하는 교만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는데, 중세의 건축양식은 교회의 이와같은 권위주의적 문화의 소산이다.

밀레니엄에 대해 언급할 때 생각나는 것은 물리적인 시간의 구분과 역사적인 시간과는 이렇다할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된다고 해서 역사적인 대변동이나 새로운 패러다임이 반드시 나타난다고 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시간은 그냥 흐를 뿐이지 시간자체가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서유럽과 비잔틴 제국 사라센문명으로 대변되는 유럽중세사에서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던 시기에 지각변동을 이룰만한 대사건이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밀레니엄이라 매사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기 좋아하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주술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구시대와 새로운 시대를 가름할만한 뉴패러다임의 변동은 오히려 15세기의 르네상스 운동에서 찾아진다. 신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중심의 세계관으로의 이동, 합리적 이성의 추구, 신대륙의 발견과 인쇄술의 발명, 원근법의 창안 등이 르네상스시대의 근대인들을 매료시킨 새로운 패러다임의 징후였던 것이다.

각기 다른 세계관을 가진 동양과 서양의 충돌은 양 문화의 전파·화합으로 이어진다

세상이 아직 어두웠던 시절, 동양과 서양은 이렇다할 교류가 없었다. 따라서 세계 문명의 양대 축을 이루는 이 두 세계는 각기 서로 다른 척도로 세상을 해석했다.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 등을 비롯한 서양의 강대국들은 신대륙의 발견이래 제국주의적 팽창정책을 끊임없이 추구해 나갔다. 탄탈로스의 목마름처럼 약소국의 복속과 정복에 눈이 어두웠던 영국은 급기야 동양의 맹주였던 중국을 넘보기에 이른다.

18세기 말엽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인들은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갖지고 있었다. 그래서 통상의 체결을 제안한 대영제국 조오지 3세의 서한을 접한 청국의 건륭황제(제위:1735-1785)는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짐의 천조에 신임장을 지참하고 귀국과 중국과의 통상을 관장할 귀국인을 파견하겠다는 귀하의 간청에 대하여 이러한 요청은 본조의 관례에 전적으로 위배되는 터이므로 아무리 하여도 수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본조의 예문과 예법은 귀국의 법식과는 전혀 상이한 것이므로 비록 귀하의 사신이 아국 문명의 기본을 습득할 수 있다 하여도 아국의 관습을 귀하의 이국 풍토에 이식한다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짐은 넓은 천하를 통치함에 있어서 오직 단 하나의 목적이 있으니, 그것은 완벽한 통치를 유지하고 국가의 본분을 이행하는 것이다.....짐은 이방의 진기한 물품을 귀중히 여기지 않으며, 또한 귀국의 산물은 짐에게 있어서 전혀 소용이 없다.”(아놀드 토인비, ‘현대문명비판’ 중에서)

그 결과는 과연 어떠했는가? 말을 타고 유라시아의 대초원을 누비던 유목민족을 정복한 이 불세출의 황제가 내린 단 한번의 판단 착오로 인해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서양의 제국에 유린당하는 참담한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각기 세계관을 달리하는 서양과 동양의 충돌은 새로운 밀레니엄의 출범을 앞둔 현재 예보?을 비껴서 양자간 화합을 도모하려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 그 화합을 인터넷이 선도하고 있다. 하드웨어로서의 국가 개념을 무색하게하는 인터넷의 발달은 새로운 ‘문화의 유복시대’를 열 것이다.

민족, 인종, 종교, 성별 등에 관계없이 ‘지구촌’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인터넷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이러한 문제의 접근에 가장 효율적인 인간의 활동이다.

새로운 아방가르드는 예술과 일상의 간격을 허무는데 지속적으로 전개한다

천여년 전, 낙타에 의지하여 실크로드를 오가던 대상은 곧 정보의 전달자였다. 그들은 서양의 정보를 동양에 전파하고, 동양의 진기한 물품을 서양에 소개하는 문화와 문명의 메신저였다. 증기기관이 발명되자 정보의 전파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라디오의 발명은 정보 전달의 속도를 더욱 빠르게 만들었다. 여기까지가 ‘올드 패러다임’의 끝이이라면, 컴퓨터의 발명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을 연 단초였다.

컴퓨터가 제공하는 ‘인터랙티브’한 상황은 예술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은 예술의 통합적 양상이다. 인터넷을 매개로 한 새로운 예술은 화랑이나 미술관과 같은 제도화된 공간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일상공간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라. 새로운 아방가르드는 공항, 고속버스터미널, 기차의 객실, 공원, 주점, 아파트에서 벌어진다. 그것은 예술과 일상의 간격을 허무는 일을 지속적으로 전개한다.

‘예술의 위기’는 오히려 제도화에서 비롯된다. 원시농경시대에 예술은 생활 그 자체요, 도덕이었으며, 자신의 삶을 비춰보는 거울이었다. 그 이후 예술은 자율성의 늪에 빠져들어갔다. 그러면서 점차 삶과 분리되기 시작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부르짖은 낭만주의자들은 예술의 세속화로부터 예술을 건져 올림으로써 예술과 삶의 거리두기를 촉구했지만, ‘다다’ 이후의 아방가르드는 예술과 일상적 삶의 통합을 모토로 삼았다. 새로운 예술의 형식에나 추구, 경이에 대한 경의, 비판적 거리주기, 반성적 회의 등은 새로운 아방가르드가 추구해야 할 덕목이다.

‘예술의 위기’는 키치를 무반성적으로 용인하는, 아니 오히려 그 자체를 유미적으로 발전시키고 상업화하는 무감각 속에서 찾아진다. 현재 독버섯처럼 창궐하고 있는 저 볼꼴 사나운 서양식 궁전들을 보라. 예식장, 유원지 휴게소, 심지어는 유치원 건물에 이르기까지 무차별적으로 파고드는 ‘키치’들에게서 우리는 오늘날 ‘예술의 위기’를 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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