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심장이 터질 지라.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는 홍길동전의 유명한 대사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 것이 홍길동에겐 왜 그토록 서러운 일이었을까. 이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일이기 때문이다.조선 후기 소설 속의 홍길동이 겪은 서러움을 21세기 현대사회에서 똑같이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돌봄노동자들이다. 이들은 계약에 의해 노동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으면서도 노동자로 불리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과 함께 이들을 노동자로 인정하고 그에 맞는 처우를 해주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알아봤다.

  노동자 아닌 돌봄노동자
  ‘이 법은 헌법에 따라 근로조건의 기준을 정함으로써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 향상시키며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다만, 동거하는 친족만을 사용하는 사업 또는 사업장과 가사(家事) 사용인에 대하여는 적용하지 아니한다.’ 이는 근로기준법내용의 일부다. 해당 법률에 따르면 돌봄노동자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가사 사용인은 근로기준법에서 배제된다. 이는 우리 사회가 돌봄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은정 교수(부경대 행정학과)는 돌봄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하는지가 그들의 처우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밝혔다. “돌봄노동자들은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노동자로서 누릴 수 있는 법적 보호로부터 배제돼 있어요. 그러다 보니 산업재해나 실업 등 노동자가 마주할 수 있는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죠.”
  뿐만 아니라 그들은 4대 보험의 대상에서도 제외된다. “국가에서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4대 보험을 지원하잖아요. 그런데 돌봄노동자들은 법적으로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지원을 받을 수가 없어요.” 한국여성노동자회 임윤옥 대표는 대개 취약계층에 해당하는 돌봄노동자들이 사회적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현실에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다.

  사실 돌봄노동이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처우가 열악한 것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뿐만이 아니었다. 이에 국제노동기구(ILO)는 지난 2011가사노동자협약을 통해 돌봄노동자의 일종인 가사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하고 그들의 노동권을 보장하도록 한 바 있다. 김학실 교수(충북대 행정학과)는 돌봄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국제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지적했다. “ILO 협약 이후에 전세계적으로 가사노동자들의 처우가 개선될 것이라는 대한 기대가 높아졌어요. 그런데 아직도 한국에선 해당 협약이 비준되지 않고 있죠.”

  국가가 책임지고 사회가 함께한다
 
  “우리 인생 전반에 편재하는 돌봄이 완전히 개인과 자유시장의 영역에 맡겨질 수는 없어요. 국가와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죠.” 임윤옥 대표는 돌봄노동 시장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현재 한국에서는 돌봄노동 제공 주체의 90% 이상이 민간기관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민간기관에 맡겨진 공급체계에서 돌봄노동자들은 노동자로서 제대로 대우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유시장에 의존하는 우리나라 돌봄노동 공급체계에 문제가 있음을 나타낸다.

  가장 성공적인 해외의 돌봄노동 공급체계 사례로 언급되는 국가는 스웨덴이다. 김은정 교수는 스웨덴의 국가 직영 체계를 소개했다. “스웨덴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돌봄노동 제공 기관이 국가 직영으로 운영되고 돌봄노동자들도 국가가 직접 고용해요. 고용의 안정성이 보장되다보니 근로 조건도 비교적 좋고 서비스 공급도 안정적으로 이뤄지는 편이죠.”

  벨기에 역시 국가가 돌봄노동의 공급체계를 제도화해 운영하고 있다. 윤자영 교수(충남대 경제학과)는 벨기에의 가사서비스 바우처(이용권) 제도를 긍정적인 모델로 꼽았다. 가사서비스 바우처 제도란 가사서비스가 필요한 수요자가 바우처 회사에 바우처를 주문하고 회사가 공급자를 통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체계를 말한다. “돌봄노동자들을 공식적인 고용관계에 편입시켜 노동과 고용관계에서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죠.” 실제로 이 제도는 한국이 벤치마킹해 2019년부터 도입할 예정이다.

  한편 국가의 직접적 개입 없이도 체계적으로 돌봄노동을 공급하고 있는 국가도 있다. 김학실 교수는 프랑스를 그 선진 사례로 꼽았다. “프랑스는 가사노동자 분야의 민간 경제 조직이 잘 발달되어 있어요. 그들은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소규모 관리센터와 연계해 가사노동자를 공급하는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죠.” 이는 경제 조직이 적극적으로 사회적 가치를 실현함으로써 사회 안에서 자생적으로 돌봄노동 공급 네트워크가 만들어진 사례다.

  너와 나의 행복을 위해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국가적 차원으로 돌봄노동자에 대한 인식과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돌봄노동자를 노동자로 명확하게 정의하는 게 우선이죠.” 김은정 교수는 돌봄노동자들을 법률로써 노동자로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여성정책원을 포함한 다양한 기관에서 돌봄노동자들을 노동자로 명시하는 법률 개정을 꾸준히 요구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 눈에 띄는 진전은 없는 것 같아요.”

  임윤옥 대표는 돌봄노동만을 위한 새로운 법률의 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노인장기요양법, 사회복지사업법, 아이돌봄지원법과 같이 돌봄의 영역에 따른 개별 법률들이 존재하고 있긴 하지만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종사자의 처우를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적용 범위가 공공서비스 영역의 돌봄노동으로 한정돼 있다. 공공서비스 영역 외의 돌봄노동, 즉 민간 시장에서 사적으로 거래되는 돌봄노동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데 비해 그들에게 적용되는 법률이 없다는 것은 큰 문제다. “저출산과 고령화에 따라 돌봄이 굉장히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음에도 이에 대한 법적 체계가 아주 부족한 실정이죠. 실제 돌봄노동자들의 의견을 반영해 돌봄노동자들을 대우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을 담은 돌봄노동기본법같은 게 만들어져야 해요.”

  또한 그는 돌봄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돌봄권에는 돌봄을 받을 권리와 제공할 권리가 모두 포함돼 있어요.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존중받으며 일할 수 있도록 권리 보장이 필요해요.”

  윤자영 교수는 돌봄노동자들과 돌봄노동의 가치에 대한 인식 개선을 촉구했다. “많은 사람들이 돌봄노동의 가치를 무시하죠. 하지만 누구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돌봄을 받거나 제공하면서 살아요. 때문에 돌봄노동자의 처우는 우리 모두의 행복과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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