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을 대입해 도출된 결과는
진실이 아닌 정보일 뿐이다
 
아주 먼 옛날, 인터넷이라는 존재를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 프랑스에 의심 많은 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세계의 모든 것의 존재를 의심했고, 심지어 앉아 있는 자신까지도 의심했다. 말 그대로 근거 없이 공연히 의심하기를 잘했다. 사전은 이런 행동을 ‘의심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나쁜 버릇’이라고 정의 내렸다. 하지만 그런 의심병의 일방적인 정의에 대해서 의심할 필요가 생겼다. 인터넷이 등장해 누구든지 정보를 제공할 수 있게 되면서 근거 없는 정보가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의심이 없다면 제대로 눈을 뜰 수조차 없다. 지난달에 일어난 ‘240번 버스 사건’은 이를 증명해줬다.

  당시 서울특별시 버스운송 사업조합 홈페이지에 올라온 한 민원은 SNS를 뜨겁게 달궜다. 민원의 내용은 이렇다. 버스에서 어린아이가 하차한 뒤 아이의 엄마가 하차하려는 찰나에 버스의 문이 닫혔다. 아이 엄마는 황급히 문을 열어 달라고 울부짖었으나 버스 기사는 이를 무시하고 다음 정거장으로 향했다. 이 민원은 순식간에 퍼졌고 이를 접한 대중은 분개해 버스 기사를 수없이 질타했다.

  하지만 서울시 측에서 CCTV를 확인한 결과 아이 엄마가 상황을 인지해 하차를 요청했을 때는 이미 차선을 변경해 하차가 어려운 상태였다. 버스 기사가 악의로 벌인 사건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런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고 나서야 사건은 종결됐고 잠시 뜨거웠던 관심은 금방 식어버렸다. 남은 건 버스 기사의 상처뿐이었다.

  이는 빙산의 일각을 전체라고 착각하여 일어난 대참사다. 대중은 민원 작성자의 시선으로만 사건을 바라봤다. 그 시선 속에는 모든 사건이 담겨있지 않았음에도 대중은 버스 기사가 잘못했다는 일방적인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사건 전체가 공개되면서 버스 기사의 무고함이 밝혀짐과 동시에 의심없는 수용의 문제가 지적됐다.

  정보는 쉴 새 없이 쏟아지고 있다. 그중에는 사건의 단편만을 가진 채로 그것만이 전부이고 진실인 양 떠드는 정보도 무수히 많다. 모든 정보의 진실을 보여주는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면 상관없지만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개개인의 판단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정보를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프랑스에 있던 의심쟁이가 한 말을.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우리는 그처럼 정보를 마주했을 때 의심병에 걸려야만 한다. 특히, 한쪽의 주장만이 제시됐을 때는 더더욱 말이다. 과연 저 말에는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되지 않았을까? 상대방의 입장도 과연 그러할까? 사건 전체를 보기 전까지 끝없는 의심을 제기 해야 한다. 의심도 없이 모든 정보가 곧 진실이라고 결론짓는 오류를 범한다면 버스 기사와 같은 무고한 희생자는 계속 등장할 테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독자에게 묻겠다. 의심병이 나쁜 버릇이라는 정의는 진실일까? 아니면 사전이 전하는 단편적인 정보일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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