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앞에 선 ‘그림 같은’ 사진 이야기
  • 권희정 기자
  • 승인 2017.09.25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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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그 라이크 어 페인팅>체험기
“보그를 루브르 박물관으로 만들어봅시다!(Let`s make Vogue a Louvre!)” 세계적인 패션잡지 보그의 수석 포토그래퍼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한 말이다. 이후 보그엔 명화에서 영감을 얻은 수많은 사진들이 실렸다.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사진들이 실린 보그지는 그 자체로 하나의 박물관이 됐다. <보그 라이크 어 페인팅> 세계적인 잡지 보그의 아카이브에서 엄선한 이미지들을 통해 패션 사진과 명화의 관계를 새롭게 탐구한다.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 
 
             ⓒ Michael Thompson                                           Francisco de Zurbaran, St Elizabeth of Portugal, 1635. 
   장미꽃을 손에 든 기품 있는 여인이 서 있다. 한쪽 얼굴에 강하게 진 음영과 강렬한 색감은 사진이 아니라 한 폭의 그림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이는 당연한 감상이다. 이 사진은 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이 1635년에 그린 초상화 <포르투갈의 성녀 엘리자베스>를 그대로 차용한 작품이었으니 말이다.
 
  성녀 엘리자베스는 포르투갈 왕비로 가난한 자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곤 했는데, 남편 드니스 왕은 항상 이를 못마땅해했다. 하루는 남편의 눈을 피해 긴 예복 속에 빈민들에게 나눠줄 재물을 숨겼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왕이 갑자기 그녀의 예복을 들췄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재물이 한 다발의 장미꽃으로 변한 것이다. 이후 장미꽃은 성녀 엘리자베스를 표현하는 데에 빼놓을 수 없는 도상이 됐다.
 
  이 사진의 작가인 마이클 톰슨은 장미를 소품으로 활용했음은 물론 수르바란이 그린 엘리자베스 드레스의 색상이나 디자인, 주름까지도 최대한 비슷하게 재현했다. 심지어는 왼쪽에서 강하게 들어오는 빛의 효과마저도 똑같이 구현해냈다. 그림의 사진화라는 표현이 이보다 더 어울릴 사진이 있을까.
 
  언뜻 패션 사진에서 명화를 그대로 차용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가장 트렌디하고 파격적인 장르인 패션 사진에서 가장 오래되고 고전적인 장면을 재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과거의 아름다움은 현대에도 적용됐다. 마이클 톰슨의 사진은 패션 사진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 수 세기 전 그림의 복식과 구도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느낌을 준다. 명화와 패션 사진. 그 몇백 년의 간극에도 이어져 온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것이다.
   
 
  같지만 다른 오필리아
 
                                                                                       ⓒ Mert Alas and Marcus Piggott
                                                                                       John Everett Millais, Ophelia, 1852.
 
  비수에 찬 모습으로 물속에 잠겨있는 한 여인이 있다. 시리도록 창백한 그의 피부는 그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말해주는 듯하다. 그의 이름은 오필리아.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인물이다.
 
  햄릿의 연인인 오필리아는 햄릿에게 버림받고, 설상가상으로 사랑하는 아버지마저 연인의 손에 살해당하는 참극을 겪는다. 가장 사랑하는 연인이 순식간에 가장 원망스러운 존재가 돼 버린 모순적인 상황에 오필리아는 정신을 놓는다. 머리에 화관을 뒤집어쓰고 들판과 강가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그는 결국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그 비극성 때문인지 오필리아는 수 세기 동안 화가들의 뮤즈였다.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은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린 <오필리아>다. 밀레이가 그린 오필리아는 말이 없었다. 허망한 표정으로 떠내려가는 그는 운명에 희생당한 가녀린 존재일 뿐이었다. 말이 없는 오필리아 대신 화가는 수많은 비유로 그의 말을 대신했다. 목에 걸린 제비꽃 목걸이는 햄릿을 향한 충절이었고, 허리 부근에 놓인 양귀비는 그의 죽음이었다. 강둑에 핀 물망초는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는 오필리아의 덧없는 바람을 조용히 속살거렸다.
 
  밀레이의 <오필리아>를 오마주한 머트알라스와 마커스 피고트의 사진은 오필리아의 죽음이라는 소재를 보다 독특하게 재해석해낸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사진에 인위적인 질감을 더하여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환상처럼 그려낸 것이다.
 
  김경아씨(33)는 비현실적인 색감 때문에 사진이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너무나도 우아한 모습이었어요. 새벽녘 차가운 기운과 풀벌레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죠. 무척 아름다워 슬픔이 더 강하게 느껴졌어요.” 어두운 강가에서 홀로 새하얗게 빛나는 피부는 오필리아의 죽음을 경이롭게 느끼도록 만든다.
 
  밀레이의 오필리아가 운명을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강물에 몸을 던졌다면, 사진 속 오필리아는 비극을 받아들이고 주체적으로 죽음을 선택한 듯 보인다. 온전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의 죽음은 보다 직관적이고 강렬한 슬픔을 전한다. 같은 소재로 같은 장면을 표현해냈지만 둘은 다른 작품이었다. 이경아씨(21)는 명화와 그를 오마주한 사진과의 관계성에 감탄했다. “명화와 사진이 어느 정도 비슷함에도 각자만의 독특함과 고유의 특별함을 지니고 있다는 게 신기했죠.”
 
  예술을 모방한 예술 

                      ⓒ Cecil Beaton                                                      Henri Matisse, La Gerbe, 1953.
   무대 디자이너 경력이 있던 사진작가 세실 비튼은 배경에 힘을 실었다. 대부분 패션 사진이 모델의 예쁜 얼굴과 환상적인 몸매만을 부각시키고 배경을 거의 신경 쓰지 않았던 1950년대에 그의 행보는 굉장히 독보적인 것이었다. 특히 세실 비튼은 무대 디자이너로서의 경험을 살려서 직접 만든 독창적인 장식품으로 배경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는 발명에 가까울 정도로 참신한 연출 방식이었다.
 
  그 대표작이 바로 프랑스 야수파 화가 앙리 마티스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찍은 사진이다. 세실 비튼은 직접 색종이를 오려 마티스 그림의 나뭇잎 모양을 만들고 이를 배경에 활용했다. 이외에도 세실 비튼은 잭슨 폴락의 그림을 배경으로 쓰는 등 현대 미술의 이미지를 그의 사진에 자주 담아냈다. 그는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보단, 카메라로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단순히 명화를 그대로 재현해내거나 재해석하는 것을 넘어서 이를 모티프로서 활용해 새로운 작품을 그려낸 것이다.
 
  정원석씨(30)는 명화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진에 표현된 것이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명화를 단순히 그림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그 속에서 패션요소를 끄집어내어 각자의 색으로 표현했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명화에 영감을 받았다는 공통점으로 한데 묶인 사진들이었지만, 명화를 활용한 이유나 양상은 모두 달랐다.
 
  에필로그
  사진은 명화를 재현하고, 재해석하고, 그도 아니면 모티프로 차용했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사진들은 전시의 제목처럼 ‘그림과 같았다(like a painting)’. 하지만 전시된 사진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림과 같이 아름다웠기’때문이 아니었다. 그림과 같은 ‘사진’이었기 때문이었다.
 
  명화에서 영향을 받은 사진은 그림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사진이 그림과는 다른 아우라를 뽐내게 된 순간. 패션 사진과 예술의 경계선은 허물어지고, 모든 사진들은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독자적인 작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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