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의 전당인 대학이 혐오의 공간이 된 것은 개탄할 일이다. 성차별을 지적한 자보를 찢고 상스러운 낙서를 새기고 개인의 신상정보를 털어 협박을 일삼는다. 모든 종류의 차별을 걷어내고 제거하는데 힘써야 할 대학이 혐오와 테러의 온상이라면 사회 어느 곳에서도 자유와 평등은 기대하기 어렵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남성처럼 자유로워야 한다는 믿음이다. 여성을 혐오하거나 여성의 자유를 억압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특정 성별이 우월하다고 믿는 자가 아니라면 페미니즘을 반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여성의 삶은 공포와 차별로 점철돼 있다. 그리고 안티페미니즘은 이에 저항하는 페미니즘을 사적인 것으로 매도한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엄연히 공동체의 문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 삶을 관통하는 차별을 ‘차별’이라고 명명하고 거둬내려는 사회적인 움직임이다. 일상의 공포와 차별을 거부한다면, 모두 페미니스트다.
 
  중대신문의 설문 결과 ‘페미니즘이 대학 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응답한 이들은 페미니즘이 역차별을 조장하고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한다고 주장했다. 성평등을 추구하는 페미니즘이 역차별을 조장한다는 주장은 근거를 찾기 힘들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수평을 한 번이라도 맞추고자 저항하는 페미니즘이 성평등을 넘어 역차별까지 만들어낼 정도로 힘을 가져봤는지 의문이다. 차별을 조장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모든 이의 평등을 근거로 맞서면 된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페미니즘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면 제대로 된 페미니즘을 보여주는 게 지성인다운 태도다. 본인이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아니라며 페미니즘 자체를 찍어 내리는 응석은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페미니즘이 제기하는 문제와 그로 인한 갈등이 불필요하다고 치부하는 것도 권력이자 폭력이다. 안전과 평등을 호소하지 않아도 안전하고 평등한 삶이 여성들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페미니스트들은 그런 삶은 당연하지 않다고, 여성의 삶을 모르기 때문에, 몰라서 할 수 있는 발상이라고 저항한다. 안티페미니스트는 그런 페미니즘이 과격하다고 손가락질한다. 인류사 내내 축적된 여성을 향한 멸시와 혐오와 차별의 두께를 거스르려는 저항이 온건하기만 바라는 것은 후안무치의 태도다.
 
  껍데기 같은 성차별은 발에 채면서 사회의 발전과 진보를 가로막는다. 껍데기를 치우려면 논쟁이 필요하다. 대학이기에 더욱 그렇다. 논쟁은 타당한 주장과 근거로 이뤄져야 한다. 비난과 날조는 물론 테러까지 자행한다면, 영락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대학과 사회 안에 껍데기가 살 곳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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