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는 자주 반복된 설정을 말합니다. 자주 쓰였다는 것은 사람들이 별 이상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당연시 돼왔다는 것을 뜻하겠죠. 이번 학기 문화부는 이 클리셰를 들여다보고 그 의미를 파헤쳐 보고자 합니다. 두 번째 클리셰는 바로 ‘혈연’입니다. 한국드라마에서 출생의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닙니다. 누구나 예측 가능하죠. 출생의 비밀이 이렇게나 자주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국 드라마 속, 또 현실 속 '혈연'의 의미를 분석해봤습니다.
 
 
“수많은 출생의 비밀에는 한국인의  무의식속에 자리한 혈연주의가 있죠.”
 
“I am your father” 영화 <스타워즈>에서 최고의 악역 ‘다스베이더’의 유명한 명대사다. 주인공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다스베이더라는 사실을 듣고 그와 맞서 싸우게 되는데 그때 다스베이더가 주인공에게 한 말이다. 이에 주인공도 시청자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혈연관계였을 줄은 전혀 몰랐으니 말이다. 혈연관계를 숨김으로써 이야기를 전개하거나 반전의 장치로 사용하는 것을 ‘출생의 비밀’이라고 부른다. 출생의 비밀은 특히 한국 드라마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한국 드라마 속에서 숨겨진 혈연관계가 왜 자주 등장하는지 드라마 <최고다 이순신>과 <내 딸, 금사월>을 통해 분석해봤다.

  주연은 혈연이었다
  드라마 <최고다 이순신>에서 주인공 ‘이순신’은 연예인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인기 여배우 ‘송미령’은 그런 이순신의 연기를 지도해준다. 그녀는 이순신을 좋게 여겨 이순신이 연기자의 길을 걷게끔 결심하게 만든다.
 
  그러다가 송미령은 이순신이 자신을 구하려다 교통사고를 당해 죽은 ‘이창훈’의 딸이라고 착각한다. 당시 그런 이창훈을 내팽개치고 사고현장을 떠났던 송미령은 이순신이 연예계에 있다간 이 사실이 탄로 날까 두려워한다. 송미령은 이순신의 오디션 서류를 빼라는 지시를 해 오디션을 못 보게끔 만드는 등 자신의 안위를 위해 한때 호의를 가졌던 이순신을 매정하게 버린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이순신을 곁에 두기 위해 온갖 일을 벌이게 된다. 사실 이순신은 이창훈이 데려다 키운 송미령의 친딸이었기 때문이다. 송미령은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에게 딸이 있던 사실을 공표하거나 돈 봉투를 들고 이순신을 키운 ‘김정애’를 찾아가는 등 자신의 친딸을 데려오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최고다 이순신>의 내용 전반은 이처럼 이순신의 숨겨진 혈연관계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사실 <최고다 이순신>은 열악한 환경에서 고난을 꿋꿋이 이겨내 일과 사랑 모두 성취하는 이순신의 성공담을 기획의도로 하고 있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순신의 성공이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보다 출생의 비밀을 더 중요하게 다룬다. 씩씩하고 주체적인 캐릭터였던 이순신은 출생의 비밀 서사가 진행될수록 무기력하고 비주체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출생의 비밀에 과도하게 집중한 탓에 본래 서사의 목적도, 캐릭터의 매력도 모두 잃은 꼴이다.
 
  드라마의 기획의도를 해칠 정도로 출생의 비밀에 많은 비중을 둔 이유는 시청자를 쉽게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다운 강사(충남대 국어국문학과)는 출생의 비밀을 남발하는 것이 한국 드라마의 고유한 정체성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혈연주의가 매우 강한 나라입니다. 낳아준 친부모만이 순수하고 온전한 형태의 가족을 구성할 수 있다는 순혈주의가 한국인의 무의식에 자리하고 있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지향하는 드라마에서 출생의 비밀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한국 대중이 그에 강하게 반응하기 때문이었다.

  혈연의 미로, 그 끝의 충격
  드라마 <내 딸, 금사월> 또한 출생의 비밀을 다룬다. 거의 출생의 비밀이라는 클리셰가 드라마 전체를 끌고 가는 형국이다. ‘금사월’은 ‘신득예’와 ‘오민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여기서 신득예는 ‘강만후’와 결혼한 사이다. 즉 금사월은 외도로 태어났다. 신득예는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보육원에 금사월을 맡긴다. 그러다가 신득예의 시어머니가 괘씸한 마음에 금사월을 보육원 원장의 딸 ‘오혜상’과 바꿔치기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둘은 바꿔치기 당함으로써 가족도 바뀐 채 서로의 운명을 대신 살아가게 된다.

  출생의 비밀과 같은 평범하지 않은 상황은 평범하지 않은 관계로부터 오기 마련이다. “출생의 비밀은 불륜과 연동됩니다. 시청자의 말초적인 호기심을 자극하여 시청률을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에 자주 사용되죠.” 윤석진 교수(충남대 국어국문학과)는 일반적으로 출생의 비밀에 전제되는 불륜 문제가 시청자를 자극한다고 설명했다.
 
  드라마에서 이런 출생의 비밀은 복합적으로 나타나기까지 한다. 금사월의 보육원 친구인 ‘주오월’에게도 출생의 비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친부 ‘주기황’은 아내와 일찍 사별하고 가난에 못 이겨 주오월을 보육원에 맡긴다. 하지만 주오월은 보육원 붕괴 사고로 잔해에 매몰됐다 ‘유권순’에게 구조돼 ‘이홍도’라는 이름으로 유권순과 함께 살게 된다. 이후에 주기황은 주오월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광고를 하는 등 노력하지만 주오월과 만나고 심지어 자신의 저택에 데리고 가서 재우기까지 하면서도 자신의 딸임을 알아채지 못한다. 이런 상황은 시청자에게 긴장감과 안타까운 감정을 느끼도록 만든다.
 
  주인공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에게까지 출생의 비밀을 부여한 이유는 시청자에게 끊임없이 긴장감을 유발하기 위해서다. “혈연주의가 강한 한국인에게 소위 ‘정상 가족’이라 불리는 형태가 아닌 가족은 공포와 위협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드라마 속 가상의 인물들이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 시청자는 그들 못지않은 공포와 긴장을 느끼게 되죠.” 이다운 강사는 출생의 비밀이 공포와 극적 긴장을 유발하기 때문에 자주 사용된다고 말했다. 혈연이 중시되는 만큼 혈연에 관련된 서사가 시청자에게 큰 충격을 준다는 것이다.

  만능열쇠가 아닌 만능족쇄
  
<내 딸, 금사월>에서 오민호는 자신이 딸이 오혜상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오혜상은 갖은 방법으로 금사월을 괴롭히지만 오민호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단지 친딸이란 이유만으로 오혜상의 잘못을 덮어주고 외려 금사월을 나무란다. 하지만 금사월이 친딸임을 알게 되고 나서는 신득예에게 더이상 금사월을 이용하려 하지 말라고 하는 등 갑자기 아버지 행세를 하기 시작한다. 평소에 도외시했던 인물이 사실 혈연관계였음이 밝혀짐과 동시에 바로 협력적으로 변모한 것이다. <내 딸, 금사월>에서 각 인물의 가치관이나 생각은 혈연이 등장하는 순간 아주 쉽게 무너져 버린다. 그만큼 드라마 내에서 혈연이 중시되고 있었다.

  물론 자신의 피가 섞인 가족에게 정감이 가는 걸 비난할 순 없다. 하지만 이다운 강사는 혈연으로 구성된 가족만이 온전한 가족이라고 전제하는 출생의 비밀은 불손한 관념을 생산하고 강화하는 부작용이 있다고 말했다. “출생의 비밀을 다룬 드라마의 큰 단점은 바로 관념적인 부분에 있습니다. 대안 가족, 비혈연 가족, 한부모가족 등 다양한 가족 형태가 구축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한국 드라마는 혈연가족의 위엄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분별하게 사용된 출생의 비밀은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는 설명이다. 대개 드라마에서 소위 ‘정상 가족’에서 자라지 못한 인물은 매우 큰 결핍감을 느끼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는 자칫 시청자의 무의식 속에 혈연으로 연결된 가정만이 진짜 가정이라는 관념을 심어줄 수 있다.

  그리스 시대 연극에선 ‘deus ex mach-ina(기계 장치의 신)’가 등장해 모든 상황을 정리하곤 했다. 현대 드라마에선 혈연이 기계 장치의 신 역할을 하고 있다. 윤석진 교수는 출생의 비밀이 갈등을 해결하는 만능 장치로 계속 등장한다면 결국 반전이 아닌 뻔한 요소가 된다고 말했다. “출생의 비밀을 남용하면 외국 시청자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상투적인 드라마가 만들어집니다. 전개의 완성도가 떨어지면서 이른바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가 양산되죠.” 만능열쇠가 된 혈연관계는 결국 드라마의 질을 떨어뜨리는 만능 족쇄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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