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공연은 ‘오늘’이었다
  • 권희정 기자
  • 승인 2017.09.04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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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에선 관객들이 배우들과 함께 무대 위에 올라 춤을 추고 각자의 '벽'을 부순다. 사진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벽을 넘은 연극으로
나의 벽을 넘어서다
 
당장 내일이 공연인데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연출가가 잠적했다. 막장과도 같은 이 이야기는 단순한 설정이 아니다. 연극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에서 관객들이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다. 지난 7월 22일 수원SK아트리움에서 열린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 공연에서 이 막막한 현실을 직접 마주해봤다.
 
  연극을 ‘출발’하다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는 씨어터RPG로 관객을 관람자에서 참여자로 끌어들이는 이머시브(Immersive) 공연이다. 관객은 연락 두절된 연출가 때문에 궁지에 몰린 조연출을 돕는 역할을 맡는다. 객석에 입장하자마자 조가 나뉘었고, 각 조에 조연출들이 배정됐다. “여름이G, 신나G, 이것이 바로 RPG, 내일이 공연인데 어떡하G!” 힘찬 구호와 함께 연극이 시작됐다.
 
  조별로 출발하자마자 분장실에서 간단한 게임을 수행하고 안무실로 이동했다. 안무실엔 하릴없이 기다리게 한 연출가 때문에 화난 외국계 안무가 MJ가 기다리고 있었다. MJ는 브로드웨이에선 아시아인이라고, 한국에선 외국인이라고 차별받는 자신의 현실을 말하며 그 상황을 ‘벽’에 비유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그리고 개인 스스로에겐 넘어야만 하지만 좀처럼 잘 넘지 못하는 ‘벽’이 있다는 것이다.
 
  MJ의 화를 풀기 위해선 각자가 벽을 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MJ는 관객들에게 알을 막 깨고 나온 새가 벽을 마주하고 좌절했다가 마침내 그 벽을 뛰어넘는다는 스토리의 춤을 가르쳤다. 몸치에 박치인 기자도 함께 어우러져 춤을 췄다. 최선화씨(46)에게 춤을 잘 추고 못 추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계속 틀렸는데도 너무 좋았어요. 정말 제가 배우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죠.” 중요한 것은 춤 실력이 아니라 모두가 자신의 ‘벽’을 깨는 연습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MJ가 떠난 후 조연출의 남자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일이 밀려서 만나기로 했던 약속을 취소해야 하는 상황에 둘은 싸우다 결국 헤어졌다. 조연출은 하고 싶은 것 하나 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안타깝다며 자기 대신 지금 하고 싶은 것을 쪽지에 적어달라고 말했다. 바로 적어내는 사람도 있었지만 걷어가기 전 마지막까지 오래도록 고민하는 사람도 있었다. ‘해야 할 것’들의 홍수 속에서 ‘하고 싶은 것’을 묻는 질문은 생소하기만 했다.
 
  벽보다 높이 띄운 별
  카페에서 간단한 게임을 수행하고 또다시 이동해 도착한 곳은 한 사무실이었다. 연출에게 성폭력 예방 교육을 요청받은 극장 관계자들이 실행 여부를 두고 토의를 하고 있었다. 조연출이 지켜보는 가운데 과장은 ‘예민한 것이 문제’라며 교육을 무산시키려 했다. 사무실 인턴은 교육의 타당성을 주장하지만 과장의 권력에 눌려 의견을 무시당했다. 여기에도 벽이 존재했다. 권력 관계라는 벽부터, 의사소통의 벽까지.
 
  수많은 벽을 체감한 조연출은 큰 종이를 주며 각자의 벽이 궁금하다고 말했다. 각자가 모두 자신의 벽을 적었다. 오하람씨(26)는 벽을 적는 순간부터 왠지 모를 위안을 받았다고 말했다. “저는 월세를 적었는데 다른 분들도 등록금, 전세금, 취업에 대한 고민을 적었더라고요. 이게 나만 하는 고민들이 아니라는 생각에 위로가 됐죠.” 자신의 고민을 내보이고 다른 사람의 고민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조연출은 자신이 연극을 하고 싶은 이유를 말하며 지금 함께 있는 관객들과 함께 작은 공연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연극은 ‘그 순간’만의 예술이라 한 번의 공연은 단 하나의 특별한 별이 떴다 지는 것과 같은데 그 특별함을 공유하고 싶다는 것이다. 공연의 내용은 간단했다. 다 같이 10초 동안 눈을 감고 있기만 하면 됐다. “여러분, 우리 별이 돼봐요.” 조연출의 말과 함께 모든 관객은 눈을 감았다. 깜깜한 시야 속에서 하나의 별이 떴다가 지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눈을 감았다가 떴을 뿐인데도 함께 있던 조원들과 미묘한 유대감이 생겼다. 방금 ‘우리만의’ 공연이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모두 함께 즐기는 각자만의 공연
  마지막으로 이동한 장소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목적을 알 수 없는 공간이었다. 따로 움직였던 각 조가 처음으로 함께 모였다. 다 같이 열을 맞추어 서자 하늘에서 고무공들이 떨어졌다. 여러분들의 벽이라며 아까 적어냈던 수많은‘벽’들이 스크린에 나타났다. 공을 던져 다 함께 저 벽을 부숴보라는 것이다. 각자 자신의 벽을 외치며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힘껏 공을 던졌다.
 
  이내 벽이 사라지고 아까 적어냈던 ‘하고 싶은 일’들이 나타났다. 하고 싶은 일을 외쳐보라는 주문에 각자가 간절한 마음으로 원하는 바를 외쳤다. 하고 싶은 일을 소리 내 외쳐보는 것만으로도 목이 메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라는 말과 함께, 안무가 MJ가 나타났다. 그 자리에 모인 100명의 관객과 배우 모두 함께 앞서 배웠던 춤을 췄다. 벽을 부수기 위한 공연을 펼친 것이다.
 
  “축하합니다. 우리의 공연이 끝났습니다. 우리에겐 이 순간을 즐길 권리가 있죠.” 안내방송이 끝나자마자 EDM 음악이 울려 퍼졌다. 관객과 배우가 모두 어우러져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서로 어깨에 손을 올리고 빙빙 돌기도 하고,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뛰기도 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 춤을 추는 데도 민망하지 않았다. 김다솜씨(18)는 연극에 혼자 참여했음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람들과 춤을 추고 함께 소리를 질렀어요. 어깨에 손을 올리고 무대를 돌아다니기도 했죠. 이 정도로 신나본 게 언제였나 싶었어요.”
 
  노래가 끝나고 스크린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갑자기 함성이 터져 나와 스크린을 유심히 봤더니 ‘만든 사람들’에 관객 한명 한명의 이름이 올라가고 있었다. 이 극에서 관객들은 정말로 배우였구나. 코끝이 아려왔다. 크레딧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 앞을 가로막고 있던 스크린이 올라갔다.
 
  스크린이 올라가자마자 보인 건 객석에서 환호하고 있는 조연출과 배우들이었다. 그 순간에서야 이 공간이 무대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무대에 서 있던 것이다. 오하람씨는 막이 올라가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올랐다고 말했다. “우리가 다 함께 놀았던 그 장소가 알고 보니 무대라는 걸 느끼는 순간 짜릿했죠. 막이 열리는 순간 ‘아, 이 순간은 오래 안 잊히겠구나’ 싶었어요.” 벽을 부수고 마주한 건 무대에 서 있는, 주인공인 ‘나’였다. 무대 위엔 100명의 관객들이 있었고 100개의 공연이 있었다.
 
  “이 연극 자체가 ‘연극’이란 벽을 넘어선 것 같았어요. 극에 참여했던 모든 관객도 각자의 벽을 넘기 위해 한걸음은 내디딘 느낌이었죠.” 최선화씨는 공연을 통해서 자신의 벽을 어느 정도 넘어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무대와 객석 사이의 벽을 넘어선 연극은 관객마저도 벽을 넘을 수 있게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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