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얼굴이 인간의 신체에서 개성을 가장 뚜렷이 드러내는 부위이기 때문이죠. 약 60억의 인구가 살고 있는 지구에 완벽히 똑같은 얼굴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일란성 쌍둥이일지라도 얼굴의 대칭에서 차이가 난다고 하니 얼굴이야말로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규정하는 정체성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 정체성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깊고 진해집니다. 화를 낼 때 찌푸렸던 미간이, 슬플 때 쳐졌던 눈썹이, 환한 미소를 지을 때 올라갔던 입꼬리가 모두 얼굴에 미세한 흔적을 남깁니다. 그 세밀한 흔적 하나하나가 개인의 얼굴을 만듭니다. 한 사람의 얼굴엔 그가 살아온 세월의 희로애락이 그대로 새겨져 있죠.
 
  그래서일까요. 얼굴은 종종 책임감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개인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부위인 만큼 ‘얼굴’을 건다는 것은 나 자신의 명예를 건다는 것과 같습니다. ‘얼굴을 걸고’는 당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의지, 혹은 포부에 대한 결심을 말합니다.  
 
  70년의 세월 동안 중대신문은 수많은 얼굴을 신문에 걸었습니다. 기자들은 언제고 끝나지 않을 듯한 긴긴 밤을 지새우며 열정적으로 중대신문을 만들어 나갔죠. 기사 끝의 바이라인은 기자의 얼굴과도 같았습니다. 모든 기자들은 기사를 통해 자신의 얼굴을 걸고, 모든 책임감을 다해 기사를 세상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그 기사들이 모여 만들어진 한 호의 중대신문은 각각 제 나름대로의 표정을 짓고 있었죠. 
 
  그 모든 기사들이 있었기에  중대신문은 지금의 위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중대신문에 아로새겨진 70년 세월의 관록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죠. 얼굴이 모든 표정을 기억하고 있듯, 중대신문 또한 모든 기사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중대신문이 한 호 한 호 지은 표정들이 모여 지금의 자랑스러운 ‘중대신문’이란 얼굴을 만들어낸 거죠. 중대신문을 다녀갔던 수많은 사람 하나하나가 중대신문의 얼굴이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중대신문을 만들어낸 얼굴 속에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얼굴도 존재합니다. 중대신문은 매 순간 독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고민하기 때문입니다. 중대신문이 기사의 논조, 표현, 이미지 하나하나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고민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결국 ‘중대신문’이라는 얼굴엔 수많은 독자분들이 스쳐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여기, 중대신문이 있습니다. 중대신문을 만들어 나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얼굴이 여기 있습니다. 그 얼굴에 지금 중대신문을 만들어 나가는,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 나갈 이들의 얼굴을 실어봤습니다. 지금 신문을 만들어 가고 있는 ‘우리’는 70년의 세월이 담긴 중대신문이란 얼굴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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