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정의는 철 지난 철학적 문제일지 모른다. 20세기 후반 이후 철학자들이 ‘인간’과 ‘주체성’에 대한 불확정성과 가변성(可變性)을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는 그런 의미에서 무척 선구적인 SF영화라 할 만하다. 물론 이 영화는 SF 소설가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1968)를 각색한 작품이기 때문에 미래 사회에 대한 성찰력은 원작자의 몫으로 돌릴 만하다.
 
  원작을 뛰어넘는 각색 영화는 드물다고 하지만, <블레이드 러너>의 영화사적 가치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여러 평자들은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말하곤 했다. 영화가 부당하게 저평가되어왔다는 뜻이다. 물론 영화는 원작 소설과 많이 다르다. 그러나 <블레이드 러너>가 20세기 SF영화의 새로운 장을 연 작품이라든가, 여러 가지 철학적 고민을 촉발시키는 의미심장한 명작이라는 평가를 외면할 수는 없다.
 
  <블레이드 러너>는, 영화는 지나치게 통속적인 상업영화와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예술영화로 구분된다는 편견을 깨게 만드는 작품이다. 대중적이면서 흥미진진한 SF영화 문법과 함께 완성도 높은 영상미를 통해 ‘인간’과 ‘정체성’의 본질에 대해 성찰하도록 유도한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영화이기도 하다.
 
  인간성과 비인간성, 기억과 망각, 주체성과 타자성. 풀기 어려운 철학적 주제들이다. 그러나 <블레이드 러너>는 이러한 문제들을 애써 설명하거나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화면과 내러티브, 그리고 캐릭터 사이에 녹여놓는다. 이 영화의 기본적인 갈등축은 복제인간 로이와 복제인간들을 폐기 처분하는 전직 경찰 데커드와의 관계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로이가 데커드보다 더 인간답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로이에게는, 최소한, 연민과 공포와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 건물 옥상에서 추락하는 데커드를 구해준 후, 가슴에 흰 비둘기를 안은 로이가 말한다. “난 네가 상상도 못할 것을 봤어. 전투에 참가했고, 기지에서 빛으로 물든 바다도 봤어. … 그 기억이 모두 다 사라지겠지. 빗속의 … 내 눈물처럼.” 그리고 로이는 4년의 제품 수명이 다해 기능을 멈춘다. 데커드를 구해주기 직전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공포 속에서 사는 기분이 어때? 그게 노예의 기분이야.” 로이와 데커드, 아니면 ‘우리들’ 중 누가 진정한 인간인가? 영화는 끊임없이 인간의 오만함을 괴롭히고 뒤흔들고, 질문한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
었다네 우리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으리니, 활짝 피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의,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파울 첼란, <찬미가> 중)
박명진 교수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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