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는 자주 반복돼 진부해진 설정을 말합니다. 자주 쓰였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으로 당연시됐다는 것을 뜻하겠죠. 이번학기 문화부는 클리셰를 들여다보고 그 의미들을 파헤쳐 보려 합니다. 첫 번째 클리셰는 바로 ‘이름’입니다. ‘이르다’라는 말의 뜻이 ‘무엇이라고 말하다’라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름은 ‘나’는 무엇이라고 말해주는 단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세상에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인거죠. 그래서일까요? 수많은 콘텐츠에서 이름은 무언가를 표현하는 복선이 되기도, 그 자체로서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콘텐츠에선 이름을 없앰으로써 효과를 보기도 하죠. 이름은 과연 콘텐츠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이름의 의미를 분석해봤습니다. 
 
 
달라진 이름
같은 사람, 다른 존재가 되다
 
영화 <너의 이름은>에서 두 주인공은 기억 너머로 잊힌 상대, ‘너’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상대를 찾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단서는 이름이다. 두 주인공은 서로의 이름을 잊지 않으려, 또 찾으려 노력한다. ‘이름’은 상대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너의 이름은>뿐 아니라 수많은 콘텐츠에서 인물의 이름은 중요한 소재로 다뤄지고 있다. 콘텐츠에서 이름은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을까. 드라마 <피노키오>와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분석을 통해서 이를 알아봤다.
 
  온전한 이름이 부른 온전한 삶
 
  드라마 <피노키오>에서 주인공은 ‘기하명’과 ‘최달포’라는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하명의 아버지는 언론의 여론몰이에 억울하게 마녀사냥을 당한다. 그 사건으로 인해 하명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이후 하명은 원래 이름을 버리고 과거를 숨긴 채 새로운 가족 안에서 최달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된다. 새로운 가족에게 사랑받는 최달포로서의 삶은 하명에게 꿈만 같다.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고 잃어버린 형을 찾기 위해 기자가 됐음에도 하명은 달포라는 이름을 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언젠간 꿈에서 깨어나기 마련이다. “YGN 뉴스, 기하명입니다.” 아버지를 억울하게 몰아갔던 기자에게 본격적으로 복수하려고 마음먹은 순간, 하명은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기하명이란 이름을 밝힌다. <피노키오>에서 ‘이름’은 하명이 살아갈 방향을 말해주는 중요한 지표다. 기하명이 됨으로써 하명은 따스한 가족 안에 안주하던 존재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가족들의 한을 풀어줄 사명을 띤 존재가 된 것이다. 
 
  언뜻 본래 이름을 찾는 것이 외려 하명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김종태 교수(호서대 문화예술학부)는 ‘본래 이름 찾기’가 인물이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절차라고 말했다.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 서사에서 인물의 정체성은 본래 이름의 보전으로 유지됩니다. 그렇기에 왜곡된 이름을 사용하던 주인공은 실제 이름을 찾아야 존재의 원형을 회복해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죠.”
 
 
최달포로서의 삶은 행복했지만 비밀이 많았다. 해소하지 못한 과거가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했다. 반면 기하명으로서의 삶은 더 이상 무언가를 연기하거나 감추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자신으로 존재하며 자신에게 닥친 일들을 하나씩 해결해나가면 된다. 제자리로 돌아가 얽힌 매듭을 푸는 작업인 것이다. 하명은 본래 이름으로 돌아옴으로써 비로소 사건을 해결하고, 아무런 억울함도 비밀도 없는 행복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한 끗 차이가 불러온 존재의 변화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드라마 <피노키오>보다 다층적으로 이름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치히로’는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외딴 길로 접어들어 이상한 세계를 마주한다. 혼란스러워하는 치히로를 ‘하쿠’라는 소년이 돕는다. 하쿠는 치히로에게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치히로는 일을 얻기 위해 마녀 유바바를 찾아간다. 유바바는 일을 주는 대신 치히로의 이름을 빼앗으며, 앞으로는 ‘센’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라 한다. 
 
  센이 돼버린 치히로는 이전과는 다른 정체성을 갖는다. 김종태 교수는 영화의 제목을 들며 센과 치히로는 다른 존재라고 말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란 제목에서부터 ‘센’과 ‘치히로’로 둘을 분리해서 지칭했다는 설명이다. “감독은 치히로의 변형인 센과, 센의 원형인 치히로의 존재론적 차이에 주목했어요. 이름이 바뀌면 존재의미 역시 바뀔 수 있다는 거죠.” 
 
  정지우 문화평론가는 이름을 뺏는 행위는 개인을 기계화시키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동양에선 아이에 대한 소망을 이름에 담아냅니다. 이름은 삶의 소망이나 개인의 잠재성을 나타내는 거죠. 그렇기에 치히로가 센이 되는 과정은 잠재성을 박탈당하고 자본주의 논리에 편입된 하나의 부품이 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치히로(千尋)라는 이름과 달리, 유바바가 준 센(千)이란 이름은 단지 숫자 1000을 의미할 뿐이다. 본래 가지고 있던 좋은 의미는 다 잃어버린 채 이 세계에선 그저 숫자에 불과한 존재가 돼 버린 것이다. 이름을 빼앗김으로써 치히로는 ‘치히로’라는 모든 가능성을 가진 인간에서 ‘센’이란 노동자로 탈바꿈됐다.
 
  이름 되찾기, ‘나’를 찾는 여정
  이상한 세계에 적응해가던 치히로에게 하쿠가 찾아온다. 하쿠는 치히로에게 ‘치히로’라는 이름이 적힌 카드를 준다. 치히로는 카드를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불현듯 그것이 자신의 본명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세계에 융화되면서 유바바의 뜻대로 자신의 이름을 잊어가고 있던 것이다.
 
  “이름을 빼앗기면 돌아가는 길을 모르게 돼. 난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나.” 하쿠가 치히로에게 하는 말이다. 본래 유바바에게 마법을 배우러 왔던 하쿠는 이름을 빼앗겨 유바바의 지배하에 놓였음은 물론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게 됐다. 유바바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즉 인간성을 가진 개인으로서 다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름을 기억해야만 했다. 
 
  김종태 교수는 이름을 뺏기면 돌아갈 수 없는 이유가 이름이 존재의 원형 그 자체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름은 존재의 의미입니다. 스스로가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리면 그 존재의 기반은 약해질 수밖에 없죠.” 이름을 잊지 않아야만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서 존립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는 하쿠가 스스로의 이름을 기억해내는 장면에서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하쿠는 ‘니기하야미 코하쿠누시’라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기억해내며 자신이 본래 강이었음을 깨닫는다. 이름을 기억함으로써 정체성을 회복한 것이다. 이후 하쿠는 처음으로 환한 미소를 보이는데, 이는 그가 일개 부품에서 벗어나 인간성을 지닌 개인이 됐음을 보여준다.  
 
  정지우 문화평론가는 이름을 찾기 위한 여정은 보다 더 본질적인 자신에 가까워지기 위한 과정이라고 말했다. “본래 이름과 일치하는 존재가 되기 위한 성장은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찾아 나간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치히로는 이름을 잊지 않았기에 유바바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치히로는 센이 됐다가 다시 치히로가 됐지만, 센이 되기 이전의 치히로와 후의 치히로 또한 온전히 같은 존재는 아니다. 치히로는 보다 더,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갖게 됐다. 본래 이름을 되찾기 위한 여정 속에서 치히로는 한껏 성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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