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권 없이는 
  지켜질 인권도 없다
 
  유럽 여행 중 전차표 구매 목록에 있던 ‘1/2’이라는 항목을 보고 친구와 설전을 벌였다. 큰 짐의 몫인가? 어린아이를 의미하나? 대형견과 함께 표를 사러 온 한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반려동물을 위한 티켓이었다. 
 
  한국 반려동물의 대중교통 이용은 이들의 몸이 쏙 숨겨지는 이동장에 넣어 다른 승객들이 볼 수 없게 해야만 가능하다. 마치 물건을 포장해 이송하듯 말이다. 반려견을 숨기듯 버스를 타 병원에 가던 내게 반려동물 티켓이 먼 나라 이야기인 것은 당연했다. 동물에게도 권리와 의무가 있다! 생각해보니 같은 생명인데 권리가 없는 우리나라 현실이 더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한국의 동물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는 고민에 이른 순간 처참한 현실과 마주했다. 우리나라는 법과 제도에서부터 동물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애초에 생명으로 여기지 않는다. 현행법 해석상 동물은 ‘물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 가정의 반려견이 동네 주민들에 의해 도살당한 사건이 있었다.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자 “그냥 법대로 하라 그래. 그냥 개 한 마리 값 물어주면 되죠”라고 당당히 말했다. 법대로라면 ‘재물손괴죄’에 불과하다. 결국 가해자가 생명을 무참히 살해한 죄는 물론이고 가족을 억울하게 떠나보낸 인간의 슬픔에 대해서도 그 어떤 책임도 양심의 가책도 가질  법적 근거는 없었다. 
 
  반려동물이 재물로 취급당하는 시점에 인간이라는 ‘소유주’를 갖지 못한 인간 아닌 동물들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현재 동물보호법은 미약하기만 하다. 종족 보존을 위해 생명의 다양성을 유지하고 야생동물을 보호한다는 목적이지만 현실 속에서 이 목적은 실현된 바 없다. 인간의 이익이 관여된 개발 논리를 이길 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합리적’ 인간에게 동물은 이익의 수단이거나 방해물이거나 둘 중 하나다.
 
  동물이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학대당할 때마저 현행법은 동물을 보호하지 않는다. 고양이를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찔러 죽인 사람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다른 개들이 보는 앞에서 망치로 개를 때려 도살한 죄에도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모두 무죄나 다름없는 처벌이다.
 
  이런 현실을 문제 삼으며 사석에서 동물권을 얘기할 때마다 피할 수 없는 반응이 있다. ‘사람도 동물처럼 못 사는데’, ‘요즘은 개 팔자가 상팔자야’ 등의 발언이다. 동물보다 우월한 인간도 잘 못 사는데 동물까지 챙겨야 하냐는 것이다.
 
  그러나 인권이 동물권보다 우월하다는 전제로 우선시돼야 한다는 말은 너무도 차별적인 말이다. 피터싱어는 『동물해방론』에서 인간의 ‘종족주의’를 비판했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월등하다는 이유로 동물들을 착취하고 차별하고 학대해선 안 된다. 인종차별이나 젠더차별 논의와 마찬가지로 백인과 흑인, 여성과 남성 모두가 동등한 인간이듯 인간과 인간이 아닌 동물 또한 동등한 생명의 존엄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어떤 생명도 ‘월등함’을 부여받은 적 없고 다른 생명을 고통으로 몰아넣을 특권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 나라의 위대함과 도덕적 진보는 그 나라에서 동물이 받는 대우로 가늠할 수 있다’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다. 인류 보편가치인 생명의 존엄을 존중하지 않는 국가에선 인간을 비롯한 어떤 생명도 행복할 수 없다는 논리에 기반한다.
 
  약자인 동물을 물건으로 여기는 나라에서 과연 인간은 물건 취급을 피할 수 있을까. 세계 최초로 유기견을 퍼스트독으로 삼은 대통령은 동물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동물권과 관련한 법과 제도는 여전히 일곱마리의 진돗개를 유기하고 떠나도 법적 책임을 지울 수 없던 과거와 달라진 바 없다. 생명을 소유할 수 있는 생명은 없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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