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어두운 곳을 밝히는 손전등’, ‘소수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확성기’ 등 기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때때로 물건이 되길 자처했다. 그렇게 앳된 신념을 마음에 품고서 당차게 프레스증을 목에 걸었지만 이내 얼마 안 가 ‘직업윤리’, ‘소명의식’, ‘신념’ 따위는 케케묵은 옛날 말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노장의 기자가 그 앳된 신념을 놓지 않았던 이유는 명확했다. 아직 자신의 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었기에.
 
 
  “음악이 바뀌면 
  춤도 바꿔라”
 
  오늘도 내 인생의 
  로드맵을 그린다
 
  1977년 <매일경제> 수습기자로 입사해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아시아경제> 회장, <시사저널> 대표이사직을 역임하기까지 40년 동안 언론이라는 외길만을 묵묵히 걸어왔다. 어느새 ‘기자 권대우’보단 ‘권대우 대표’가 익숙한 그이지만 언론매체의 발전과 투명한 사회를 꿈꾸던 청년의 소망은 여전했다.
 
  -저널리스트와 경영자, 자신이 두 가지 중에 어느 선상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나.
  “전 영원한 저널리스트이자 장사꾼이에요.(웃음)”
 
  -같이 갈 수 있다고 보나.
  “글로만 먹고산다? 아주 옛날에만 가능했던 일이고 지금은 힘들어요.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죠. 결국 글을 쓰던 사람들도 경영을 시도하게 돼요. 그중에서도 전 언론을 경영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면 기자들이 취재와 글을 쓰는 데 편하게 집중할 수 있을지 고민하죠. 이런 고민이 저널리즘의 연장선이 아닐까요.”
 
  -안 그래도 시사저널에 부임하고 매출을 10% 이상을 올렸다고.
  “제가 시사저널 대표이사직을 맡고 지난 5년 동안 ‘Good Company Conference’를 꾸준히 진행해왔어요. 매년 새로운 기업의 아젠다를 제시하고 경제 솔루션을 강구하는 컨퍼런스인데요. 시사저널이 경제신문은 아니지만 제가 경제 전문 언론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경험을 살려 기획한 프로그램이죠. 실제로 이 프로그램을 하고부터 꾸준히 매출이 올랐고 작년에는 기존보다 15% 이상을 돌파했답니다.”
 
  -매출 상승뿐만 아니라 시사저널의 다양한 변화를 이끌고 있다고 들었다.
  “언론시장은 정말 척박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특히나 사회적인 이슈만을 다루는 시사저널은 더 어려워요. 그래서 앞서 언급한 컨퍼런스를 진행해왔고 재작년부터는 순수한 일반 경제신문들과 경쟁해보고자 <시사저널 ECONOMY>이란 매체를 창간했어요. 또 올해 LA부터 시작해서 시사저널 미주판도 발간하고 있고요.”
 
  -하지만 시사저널은 ‘시사전통주간지’라는 이미지가 확고한데.
  “새로운 변화로 인해 본 역할인 시정의 감시자로서 비판을 소홀히 해선 안 되죠. 시사저널은 비교적 작은 언론사이지만 기자 개개인의 능력은 매우 우수해요. 하나의 주제를 깊이 파고드는 데에는 베테랑 선수들이죠. ‘남들이 안 쓰는 기사’, ‘이미 보도된 사안일지라도 다른 시각을 담은 기사’ 이 두 가지는 시사저널 기자들의 원칙이랍니다.”
 
  -실제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건에 대해서 가장 먼저 취재했다고.
  “2014년에 ‘정윤회가 박지만 미행을 지시했다는 의혹’에 관한 기사를 가장 먼저 보도했어요. 그 후에 세계일보, JTBC 등 각종 언론에서 후속 특종을 내면서 국정농단사건이 수면 위로 떠 올랐죠. 이뿐만 아니라 반기문 전 UN사무총장의 뇌물수수 의혹에 관한 기사도 가장 먼저 보도했고요. 이로 인해 말 못 할 압박을 겪기도 했고 심지어 제 기자 생활 최초로 UN 본부에서 항의를 받기도 했죠. 그런데 이건 특종 선점의 문제가 아니라 기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직업윤리였다고 생각해요.”
 
  “음악이 바뀌면 춤도 달리 춰야 하지 않겠어요?” 권대우 대표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빠르게 적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매일경제, 아시아경제 등의 경제 전문 언론사에선 충실하고 신속하게 기사를 보도했다면 시사저널에서는 기자들의 특성을 살려 ‘심층취재’에 중점을 둔 것이다. 이처럼 현재를 진단하고 행동하는 능력이 그의 강점이다.
 
  -언론은 그동안 개혁대상으로 지목되곤 했다. 정권교체 이후 시사저널의 행보는 어떻게 될 거 같나.
  “시사저널이 보수 쪽에서는 진보언론, 진보 쪽에서는 보수언론이라고 불려요. 그래서 동서남북, 전 사방에 적이 있다며 우스갯소리를 하곤 하죠. 하지만 개의치 않는 건 그 말인즉슨 어디에도 치우쳐 있지 않다는 걸 의미하잖아요. 어떤 진영논리에도 휘둘리지 않고 ‘룰’에 반하는 행동을 비판할 뿐이에요. 진실을 좇다 보면 어느 쪽에도 환영받지 못할 테지만 그게 언론의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시사저널이 신뢰받는 이유인가.
  “지난 대선 당시 시사저널의 유명한 대기자분이 모 후보의 캠프에 합류하고자 의사를 밝히셔서 바로 사표를 수리했었어요. 시사저널은 철저하게 중립을 취하면서 어느 쪽이든 비판받아야 할 부분을 꼬집어야 하니까요.”
 
  최근 미국의 직업평가에서 최악의 직업으로 신문기자가 뽑혔고 그다음은 방송기자였다. 이처럼 기자는 여러 방면에서 선호 받지 못하는 직업군 중 하나다. 그런데 이런 기자 생활을 40년간 해왔다면 어떤 기분일까. “언론인만 힘든가요. 농사를 짓든 공사를 하든 모든 일이 다 힘들죠. 정치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닐걸요? 중요한 건 ‘얼마나 어려운가가 아니라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맡은 바를 다 했는가’에요.”
 
  -77년에 매일경제에 입사했다. 경제 전문 언론에 입사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딱히 경제 전문 언론만을 고집한 것은 아니었어요. 당시 전공 교수님의 권유로 매일경제 시험을 봤고 합격해 입사하게 됐죠. 제가 신문학을 전공했는데 경제에 대한 기사를 쓰려고 하니 초기에 좀 고생을 했어요.(웃음) 남들은 4년 동안 배운 경제학을 전 책으로 독학해야만 했죠. 풋내기 기자 시절엔 전 우수하지도 않았고 남들 따라가기 급급했어요.”
 
  -하지만 결국 매일경제 편집국장까지 역임하지 않았나.
  “이왕이면 편집국장을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어요. 하지만 농촌에서 올라와 서울살이도 벅찼었죠. 특별히 똑똑하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열심히 하는 것뿐이었어요. 기자가 되고 5~6시 사이에 일어나지 않은 적이 없답니다. 이른 아침부터 책과 신문을 가까이하며 성실히 살았더니 결국 노력이 빛을 발하더라고요. 매일경제 공채 7기인데 모든 6,7,8기생 중에서 제가 편집국장으로 뽑혔죠.”
 
  -뿌듯했겠다.
  “편집국장을 한 것, 그 자체도 좋았지만 매일경제의 발전을 끌어당기는 데 일조해서 기뻐요. 이전엔 <서울경제>, <한국경제>, 그리고 지금의 <헤럴드경제>에 비해 경쟁력이 부족했는데 지금은 한국 최고의 경제신문으로 거듭났잖아요.(웃음)”
 
  -매일경제에서 퇴임한 후엔 아시아경제의 회장직을 맡게 됐다.
  “거의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매일경제에 헌신했죠. 그런데 그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제 인생의 로드맵은 편집국장, 거기서 끝이었거든요. 그래서 이리저리 방황했던 거 같아요. <일간건설> CEO로 활동하기도 하고 모든 걸 버리고 산속 외딴 별장으로 떠나기도 했죠. 그러다가 어느 날 아시아경제 회장으로 초빙이 됐는데, 그때 새로운 시작을 또 경험하게 됐어요.”
 
  -새로운 시작이라면.
  “그 당시에 ‘아시아경제 대표 권대우’라고 적힌 명함을 내밀면 제게 경제연구소장이냐는 질문을 하곤 했어요. 정말 자존심 상했었죠.(웃음) 그래서 아시아경제를 알리기 위해 기자가 아닌 회장직을 맡고 있으면서도 ‘권대우의 경제레터’라는 칼럼을 연재했었어요. 매일 아침 하루도 빠짐없이 200자 원고지에 15매씩의 분량의 글을 썼죠.”
 
  -실제로 아시아경제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공헌을 했다고.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에도 오를 만큼 영향력이 있었어요. 심지어 아시아경제보다 제 칼럼이 유명해질 정도로요.(웃음) 유명세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아시아경제라는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는데 공조했다는 점에서 제겐 의미가 있죠. 회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연재했었고 많은 애정이 있었기에 그동안의 칼럼을 묶어서 책으로도 출판했었답니다.”
 
  -매일 칼럼을 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그렇죠. 그래서 책을 참 많이 읽었어요. 그때가 제가 태어나서 가장 공부를 많이 했던 시기인 거 같아요.(웃음)”
 
  -중앙대 재학시절에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나 보다.
  “음. 안 한 게 아니라 못 했다고 하고 싶어요.(웃음) 저도 기자님처럼 중대신문 기자로서 활동했었거든요.”
 
  -70년대 중대신문은 어떠했나.
  “그때도 중대신문은 치열한 곳이었죠. 1학년 1학기에 UBS에 PD로 입사했었는데 신문기자가 제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그렇게 2학기 땐 중대신문 수습기자가 됐죠. 지금 보면 패기 어리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전 처음부터 편집장이 되고 싶었어요. 동기들 사이에서도 선두주자로 서고 싶었고요. 군대에 가는 바람에 계획이 다 어그러졌지만요.(웃음)”
 
  -아쉬웠겠다. 그래도 임기만료는 했나.
  “그땐 임기만료보단 편집장을 했는지가 중요한 문제였죠.(웃음) 제대 후 다시 중대신문에 입사하기엔 늦었고, 임기만료도 하진 못했어요.”
 
  -2008년에 자랑스런 중앙언론인상을 받았었다.
  “매일경제 편집국장을 역임하던 시기, 아시아경제 회장직을 맡고 있던 시기 이렇게 두 번이나 상을 주셨어요. 중앙대 동문으로서 학교에 많은 도움을 주지는 못했는데 정말 감사할 따름이죠.”
 
  -중앙대 객원교수로서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지 않았나.
  “모 학교에서 강의를 부탁하셔서 기쁜 마음으로 승낙했는데 석사학위증을 요구하시더라고요. 전 학사학위만 있었거든요. 그래서 급히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공부했고 학위증을 받자마자 수업을 진행했어요. 그 후 중앙대 학생들과도 강단에서 함께 할 수 있었죠.”
 
  그에게 기자가 되고자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묻자 그는 소탈하지만 진실 되게 답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지만 특별한 이유는 없었어요. 그냥 ‘기자가 되면 좋을 거 같다’는 호기심이었죠. 어린 시절 제가 살던 시골 마을에 한 언론사에서 일하던 형이 있었는데 정말 멋있어 보였거든요.(웃음) 그렇게 막연히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중앙대 신문학과에 오게 되면서 더 기자라는 직업에 더 가까워졌던 거 같아요.”
 
  -요즘엔 새로운 로드맵을 구상 중이라고. 
  “교수가 아닌 학생으로서 다시 중앙대에 다니고 있어요. 제가 언론학 학·석사를 취득했잖아요. 이번에는 경영학 석사에 도전하고 있답니다. 제가 경제 전문 언론 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현장에서 배운 지식을 이론으로 찬찬히 정리를 해보고 싶더라고요. 또 하나는 굉장히 엉뚱하다고 느낄 수 있는데, 요즘엔 클라리넷에 푹 빠져있죠.”
 
  -갑자기 클라리넷이라니.
“클라리넷을 배운지 3년 정도 됐는데요. 10년 배운 사람 못지않게 연주한답니다.(웃음) 어제도 연습하고 왔고 오늘도 연습실로 퇴근할 예정이에요.”
 
  -수준급 실력인가.
“아직은 부족하지만 열심히 해서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들어가는 게 제 꿈이에요. 언젠가 언론계에서 제구실을 다하게 된다면 클라리넷을 연주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어요.(웃음)”
 
  ‘권대우가 만난 사람’이라는 코너를 진행하기도 했었던 그에게 인터뷰어가 아닌 인터뷰이로서 인터뷰를 진행한 소감이 어땠는지 물었다. “사실 전 누가 인터뷰 부탁을 해도 승낙하지 않는 편이에요. 제가 기사로서 소개될 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제가 조간신문 1면 탑에 크게 실릴 날이 온다면 모를까요. 다만 제 경험들이 중앙대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기를 바랄 뿐이죠. 아무튼 전 인터뷰 하는 편이 좋지, 당하는 입장에 서니 어색하네요.(웃음)”
 
  -마지막으로 언론인을 꿈꾸는 중앙대 후배들에게 한마디 해 달라.
  “먼저 모든 중앙대 후배들에게 구체적인 인생 로드맵을 그리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당장 앞에 있는 일을 해내는 것도 좋지만 50대, 60대, 70대를 겪으며 무엇을 할지 세세하게 계획했으면 좋겠어요. 전 꿈꾸던 편집국장을 50대 초반에 역임하고 나니 다음 계획이 없어 허무하더라고요. 그리고 언론인을 꿈꾸는 이들에겐 질문하는 연습을 하면 좋겠다는 조언을 해주고 싶어요. 기자의 역량을 좌우하는 건 질문의 품격이라고 생각해요. 글을 쓰는 건 하면 할수록 늘고 금방 잘할 수 있지만 질문하는 기술은 노력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독서가 전제돼야 할 것이고, 탐문 취재를 마다하지 않는 열정이 있어야 하겠죠.”
 
  당신에게 중앙대란?
  “대학 시절엔 먹고 사느라 바빴지만 그 와중에도 따뜻하고 정 넘치는 추억들이 많아요. 같이 농촌에서 올라온 친구들 두 명과 저 이렇게 세 명이 학교 앞 라면집 단골이었어요. 돈은 없는데 배는 고프니까 각자 밥을 싸 들고 가서 라면 하나만 시켜놓고 국물과 단무지를 축내곤 했었어요. 라면집 사장님이 저희를 잘 챙겨주셨죠. 가난했지만 그리운 추억들이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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