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수필 및 비평 공모 사회비평부문 수상작
  • 중대신문
  • 승인 2017.05.27 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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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민구 학생(독일어문학전공 4)「어떤 역사적 기억에 대한 사유」
  장면 1.
  작년 여름 다하우 강제수용소를 찾았다. 드물게 날씨가 좋은 날이었고, 마을은 더할 나위 없이 예뻤다. 다하우의 모습은 여느 남독일 마을처럼 목가적이고 소박했다. 마치 지난날의 끔찍한 역사와 무관하기라도 한 듯. 수용소는 바로 그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수용소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서 당시의 여름도 이렇게 아름다웠을 거라고 생각하니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목가적인 마을의 일상과 격리되지 않은 곳에 놓인 절멸의 공간에서 약간의 그로테스크함까지 느껴졌던 것이다.
 
  한참 수용소 터를 둘러보던 중 눈앞에 한 무리의 학생들이 지나갔다. 이스라엘에서 온 고등학생들인 듯했다. 그런데 그들 중 대부분이 망토처럼 메고 있던 커다란 이스라엘 국기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나는 마을의 예쁜 광경과 수용소의 대비에서 느꼈던 감정보다도 더 복잡한 마음에 사로잡혔는데, 그건 꼭 오늘날 국제정치에서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모습이나 여전히 계속되는 가자지구에 대한 폭격 등이 떠올라서만은 아니었다. 스스로도 잘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을 남겨두고 나는 다하우를 떠났다.

  장면 2.
  그 겨울 베를린을 찾았다.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는 마침 커다란 이스라엘 국기와 함께 거대한 메노라1가 있었다. 그곳을 지나 바로 옆에 위치한 ‘유럽 유대인 희생자 추모지’로 걸어갔다. 직전에 봤던 광경 때문이었을까. 추모지는 전에 들렀을 때와는 분명 다른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일전 다하우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이 이름 모를 불편함이 좀 더 구체화된 것은 이후 훔볼트 대학 본관 옆에 있는 ‘노이헤 바헤 (Neue Wache)’를 찾았을 때였다.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시작되는 가로수 길, ‘운터 덴 린덴’을 따라 쭉 올라가면 길이 끝나는 지점에 훔볼트 대학 본관이 있고, 그 옆에 ‘노이에 바헤’라는 작은 건축물이 있다. 프로이센의 위병소이자 당대 ‘제국의 건축가’ 프리드리히 슁켈의 작품으로 유명한 이 작은 건물은 1993년 독일 통일 직후 수상 헬무트 콜의 제안으로 ‘전쟁과 폭력의 희생자를 위한 국립추모소’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당시 추모소 내부에 케테 콜비츠의 유명한 조각상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의 확대복제품을 ‘전쟁과 폭력의 희생자들에게’라는 비문과 함께 설치했는데, 이를 두고 독일에선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

  먼저 정형화된 자애로운 어머니 상의 재현이라는 페미니즘 비판이 있었고, 이어서 무엇보다 국가폭력에 반대하는 주제를 가진 이 작품을 통일독일이라는 새로운 국가의 상징으로 삼지 말라는, 즉 국민감정의 유화와 동원을 위해 이용하지 말라는 비판이 따랐다. 2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1998년 ‘디 차이트 Die Zeit’지에 기고한 글에서 조각상 앞에 새겨진 ‘전쟁과 폭력의 희생자들에게’라는 문구의 모호성을 지적하며 이런 식의 역사적 기억 방법은 가해자와 희생자 모두를 ‘수동적’ 피해자로 둔갑시킬 수도 있음을 강하게 비판했다.3

  코젤렉의 비판, 그리고 헬무트 콜의 정치적 의도에서 우리는 오늘날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 기억되는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국가의 기억으로서 안착되어버린 역사. 공유된 기억으로서 국민을 만들어 내는 역사. 그럼으로써 다시 현존하는 체제를 온존케 하는 역사.

  어떤 역사적 기억 
  파울 첼란은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위하여’라는 부제를 붙인 「나무 없는 나뭇잎 하나」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이야기가,/그것이/너무 많이 이야기된 것이므로,/거의 일종의 죄악이라면,/그것은 어떤 시대인가?” 그는 1958년 브레멘 문학상 수상연설에서도 피해자인 자신이 수상자로서 가해자 독일(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하는 당혹감을 은근히, 그러나 ‘문제적인 독일어’를 통해 도발적으로 내비치며 표현한 적이 있다. 4 
 
  당시까지만 해도 첼란에게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의 반성은 결코 충분치 못한 것이었다. 그는 결국 1970년 센느 강에 몸을 던진다. 그러나 첼란의 비극적인 자살로부터 거의 반세기가 지난 오늘, 나는 그가 느꼈던 바와 조금은 다르게, 나치 시대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어떤 기억만이 또는 어떤 이야기만이 넘쳐나는 게 아닌가는 인상을 떨칠 수가 없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은 결코 ‘충분히’ 이뤄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오늘날 나치 시대에 대한 반성적 기억을 환기하는 이미지는 어쩌면 다른 어떤 기억들의 자리마저도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나치를 생각할 때 곧잘 떠올릴 수밖에 없는 히틀러와 괴벨스가 만들어 낸 압도적인 파시즘의 이미지, 그리고 그것이 빚어낸 아우슈비츠의 압도적인 실어감(失語感, Sprachlosigkeit) 앞에서는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나치 시대에 대한 역사적 반성의 시도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독일의 거리 곳곳에서는 길바닥 또는 건물을 막론하고 그 시기 벌어졌던 역사를 기억하는 동판과 비석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이런 시도마저도 당시의 ‘특정한’ 장면과 기억만을 불러오는 것이라면? 그래서 어쩌면 지금도 우리 곁에 있을지 모르는, 그 시대를 가능하게 했던 문제적 장면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라면?

  역사를 문제화하는 시도
  나치의 탄압을 피해서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 다다이스트 미술가 존 하트필드는 <히틀러식 경례의 의미>라는 유명한 포토몽타주 작품을 남겼다. 그림에 나타나는 히틀러의 이미지는 나치식 거수경례를 하고 있는데, 그의 뒤로 서 있는 거대한 몸집의 얼굴 없는 자본가가 경례하는 히틀러의 손에 지폐뭉치를 전달하고 있다. 자본가 앞에 선 히틀러는 정작 매우 작은 모습이며 그 아래엔 ‘작은 남자가 큰 하사금을 부탁한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하트필드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거대자본과 결탁한 파시즘의 본질, 나아가 자본주의 헤게모니 전쟁으로서의 2차 대전의 성격이었을 테다. 미국의 참전 전까지만 해도 GM, 스탠다드 오일을 비롯한 유수의 미국 대기업들은 앞 다투어 ‘히틀러 특수’를 반겼다. 그러나 정작 전쟁을 추동한 자본이 여전히 ‘얼굴 없는’ 모습으로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어쩌면 자본주의를 더 이상 위협하지 않는 역사적 기억만을 간직하려 하는 것은 아닐까.
 
  이 ‘안전한 기억’이라는 이름의 역사, 국가가 전유해버린 역사적 기억을 다시 되찾아오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파시즘을 물리쳤던 자유민주주의가 알제리와 베트남에서 제국주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그들 역시 파시즘의 수행자들과 다를 바 없음을 보여줬던 시기, 국가사회주의가 프라하를 ‘붉게’ 물들이며 시베리아에서 수용소가 온전히 나치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시켜 줬던 60년대를 통과하면서 독일과 일본에선 이 문제를 매우 ‘문제적’으로 사고했던 집단이 나타났다.
 
  1974년 8월 30일, 도쿄의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건물에서 폭탄이 터졌다. 약 한 달 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늑대’ 부대는 이것이 “일제 침략 기업에 대한 공격”이었음을 밝히는 성명서를 낸다. 이후 연속해서 미쓰이물산, 다이세이건설 등 일본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탈과 식민지 지배 속에서 성장한 기업들이 ‘대지의 엄니’, ‘전갈’ 등의 다른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부대에 의해 폭파공격을 당한다. 그들은 천황 히로히토 역시 암살하려 했는데, 이 테러의 목적은 전전과 전후가 단절되지 않은 일본 전후민주주의의 기만적 속성을 드러내고,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과거와 단절코자 하는 데에 있었다.5
 
  같은 시기, 독일에서도 ‘적군파’(RAF)가 독일의 전쟁기업에 대해, 우익 경제인과 정치인, 보수 언론사, 주독미군부대 등에 테러를 감행했다. 그들의 테러는 전후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만들어낸 질서 속에서 잊혀 버릴 위기에 처한 역사적 기억을 순간 되살려 놓았다. 하지만 지금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나 적군파는 어떻게 기억되는가. 그들의 존재는 오늘날 다만 일부 과격주의자 내지 맹동주의자로, 그들의 활동은 무고한 인명을 살상했던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될 ‘테러 행위’로 소환될 뿐이다. 확실히 오늘날 독일과 일본의 ‘국민적 기억’ 속에 그들의 자리는 물론이고 그들이 지녔던 목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찾아보기란 어렵다.

  패배자의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
  히틀러와 스탈린이 불가침조약을 맺었던 1939년, 인류 역사가 가장 어두웠던 순간이자 빅토르 세르주가 “세기의 자정”이라고 표현했던 그 위기의 순간에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 지점에 놓고 역사적 기억을 구원하려고 했던 대담한 시도가 있었다. 바로 ‘역사철학테제’로 널리 알려진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다. 벤야민 자신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이기도 한 이 짧은 글에서 우리는 오늘날 역사를 기억한다는 일의 의미를 다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적 유물론의 중요한 과제는 위험의 순간에 역사적 주체에게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를 붙드는 일이다. 그 위험은 전통의 존속에뿐만 아니라 그 전통의 수용자들에게도 닥친다. 둘 모두에게 그 위험은 똑같은 것으로서 지배 계급의 도구로 넘어갈 위험이다. 어느 시대에나 전승된 것을 제압하려 획책하는 타협주의로부터 그 전승된 것을 쟁취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죽은 자들도 적이 승리한다면 그 적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다는 점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는 역사가에게만 오로지 과거 속에서 희망의 불꽃을 점화할 재능이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적은 승리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테제 6번) 6

  벤야민에게 있어서 과거가 ‘실제로 어떤 것이었는지’를 아는 일은 그리 중요치 않다. 그는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과거를 영원히 박제화하고, 역사를 지배계급의 지배 수단으로 편입시키는 것임을 지적한다. 때문에 우리의 임무는 위기 순간에 문득 ‘섬광처럼’ 나타나 현재세계의 지배관계의 모순과 균열을 발견하게 만드는 역사적 기억을 붙잡고, 그것을 다시금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국가의 기억으로서의 ‘공식’ 역사가 누락시키거나 부인한 기억, 다시 말해 기성 질서를 전복하는 역사적 기억을 되살려 내는 일을 뜻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과거 속에서 희망의 불씨를 일으키는’ 작업이다.
 
  벤야민은 또한 적의 승리로 인해 ‘죽은 자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오늘날 죽은 자와 그 기억을 모욕하는 이는 단순히 ‘홀로코스트는 없었다’고 외치는 자들만은 아닐 테다. 그들의 정신 나간 외침은 큰 반향 없이 사라지는 실정이지만, 헬무트 콜이 그랬듯 지나간 역사를 국가 통합의 도구로 만들려는 시도는 다르다. 희생자와 가해자가 구별되지 않고, 모두가 피해자라는 식으로 기억되는 바로 그곳에 제한된 역사적 의미와 함께 새로운 국민의 자리가 위치 지워지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누구에 의해 만들어 지는가. 역사를 전유하고 있는 지배자들의 승리는 지금도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휙 지나간다. 과거는 인식 가능한 순간에 인식되지 않으면 영영 다시 볼 수 없게 사라지는 섬광 같은 이미지로서만 붙잡을 수 있다. “진리는 우리에게서 달아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켈러의 말은 역사주의가 추구하는 역사의 이미지를 표현해주는데, 바로 이 지점이 역사적 유물론자에 의해 혁파되는 장소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매 현재가 스스로를 그 이미지 안에서 의도된 것으로 인식하지 않을 경우 그 현재와 더불어 사라지려 하는 과거의 복원할 수 없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테제 5번)
 
  퓌스텔 드 쿨랑주는 역사가에게, 만일 그가 지나간 어떤 시대를 추체험하고자 한다면 이후 역사의 진행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머리에서 떨쳐버려야 할 거라고 제안한다. 역사적 유물론이 파기했던 방식을 이보다 더 잘 특징지을 수 없다. 그것은 감정이입(Einfühlung)의 방식이다. 그것의 원천은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진정한 역사적 상을 붙잡을 자신이 없는 마음의 나태함, 태만(acedia)이다. [중략] 이 슬픔의 본질은 사람들이 도대체 역사주의적 역사가는 누구에게 감정이입을 하는지 물음을 던져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대답은 두말할 나위 없이 승리자에게 감정이입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그때 지배하는 자들은 예전에 승리했던 자들의 후예들이다. 그에 따라 승리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일은 그때그때 지배하는 자들에게 도움을 준다. [후략] (테제 7번)
 
  앞서 말했듯 나치 시대의 역사를 기억하려는 시도에 결코 충분함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 일환으로 감정이입을 통하는 방식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정치적으로 적절치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정화된 시간과도 같은 특정한 역사적 이미지는 ‘지금시간’의 관점에서 ‘진정한 역사적 이미지를 붙잡기’를 방해한다. 때로 홀로코스트가 주는 압도적인 이미지는 나치와 그의 시대를 예외적인 것으로, 어떤 광기의 시대로 떠올리게 만들지만, 정작 나치 정권은 매우 합리적이고 때론 민주적이기까지 한 일상의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며 그 시기를 오직 예외적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이들과 언제나 그 ‘예외상태를 상례적으로’ 유지하려는 자들은 누구인가.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을 계속 이어가려는 이는 누구인가. 이제 히틀러는 없다. 하지만 지난날 파시즘의 후원자를 자처했던 이들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억압받는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비상사태’ (Ausnahmezustand, 예외상태)가 상례임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이에 상응하는 역사의 개념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비상사태를 도래시키는 것이 우리의 과제로 떠오를 것이다. [후략] (테제 8번)
 
  벤야민은 지배계급의 역사적 시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역사의 자유로운 하늘 아래에서 펼쳐질) “과거 속으로 뛰어드는 호랑이의 도약”(테제 14번)이 필요하다고 했다. 앞서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는 동안 등장했던 운동은 지배계급의 역사에 균열을 내고 그 속으로 뛰어들었던 시도였다. 벤야민이 칼 크라우스를 인용해 테제 14번의 말머리로 삼은 “근원이 목표다”라는 말처럼. 또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비상사태를 도래시키고자 했던 억압받은 자들의 시도가 아니었을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낡은 것’(오래된 질서)이 소멸해가고 있음에도 ‘새로운 것’(새로운 질서)이 태어날 수 없는 상황, 그 공백기(interregnum)에 병적인 징후들과 함께 위기가 나타난다고 말한 바 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역시 그람시의 관점을 이어받아 오늘날 세계가 놓인 상황을 ‘공백기’로 규정한다. 현재의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옷을 바꿔 입고 나타나지만 그것은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낡은 것의 반복되는 재현이자 스스로 죽음을 피하려는 발악적 몸부림에 가깝다. 실제로 우리는 지난 백여 년 간 자본주의의 항상적 위기 속에 살았으며, 신자유주의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재현된 금융화의 질서는 다시금 세계를 파국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러나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한 이후 자본주의 세계의 ‘바깥’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고 여기는 인식이 팽배해졌고, 새로운 질서의 등장은 아직 요원해 보인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은 인류에게 언제나 새로운 희망을 약속할 것만 같았던 해방의 서사가 비참하게 추락했음을 확인하는 것임과 동시에 세계는 이제 닫힌 것이라는 선언이기도 했다. 가장 먼저 역사가 종언을 고했고(후쿠야마), 세계는 이제 평평해졌으며(토마스 프리드먼), 미래는 사라지고 이제 ‘미래 이후’만이 남았다는(비포), 다시 말해 끊임없는 현재의 연속만 있을 뿐이라는 식의 언설이 뒤따랐다. 하지만 미국의 신보수주의자들이 섣불리 자축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승리는 2008년에 별안간 재현된 위기 앞에서 철회되거나 충분치 못했음이 드러났고, 이 문제적 상황을 극복하기에 이탈리아 자율주의자의 얘기로는 어딘가 불충분하다는 인상을 떨치기가 어렵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미래가 사라지면 과거도 위험에 처한다’던 벤야민의 경고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때 미래는 단순히 물리적 시간의 연속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건 희망의 다른 이름이자 ‘세계’는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지금까지의 세계에 종언을 고하고 이 세계를 유지시켜 온 “역사의 연속체를 폭파”(테제 15번)해버릴 가능성이었다. 벤야민의 역사철학은 그 가능성을 이미 희미해져버린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찾아내고자 했던 시도였다. 때문에 ‘미래’가 없어진 지금, 과거는 더 이상 ‘구원의 순간에 인용 가능한 대상’(테제 3번)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최근의 문화산업이 과거를 불러오는 경향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이제 우리가 확인하는 과거는 철저히 노스탤지어적이거나 또는 탈의미화되어 ‘깨알 같이’ 나열된 사실들의 집합으로 현상될 뿐이다. 사라진 미래와 단절된 과거만이 있는 자리에서 과거에 존재했던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현재시간으로 의미화하려는 시도를 찾아보기란 어렵다. 그 자리엔 이제 개량 혹은 개선에 대한 요구만이 들어설 뿐이다. 지난 위기의 순간, 과거의 진정한 역사적 이미지를 붙잡는 데에 실패했던 자들은 개량만을 외칠 줄 알았던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결국 역사의 참극을 막아내지 못했다.
 
  오늘 세계는 다시 위기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냉전이 끝난 곳에서는 열전이 부활했으며 그 영향으로 생겨난 무차별적 테러의 결과, 유럽에선 통합된 EU 대신 사라졌던 국민국가의 개념이 국경과 함께 부활하는 추세다. 각 국가에선 국민감정을 자극하는 극우포퓰리즘이 무시 못 할 정치적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러나 이 ‘비상사태’의 책임은 다시, 그리고 명백히 지배자들에게 있다. 구원을 기다리며 ‘아직 채 다 죽지 못한 그들’의 과거를 불러오는 작업은 그렇다면 이제 또 한 번 이뤄져야 할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 내야 할 과제가 지금 우리에게 주어졌다. 다시 다가온 과제를 생각하며 재일조선인으로서 늘 억압받는 자의 위치에서 지배자의 역사를 사고했던 시인 김시종의 말로 글을 마친다.
 
  우리들이 지기를 계속하는 한 권력은 언제까지고 이기고 있어야 한다. 강자에게는 단 한 번의 패배가 결정적이지만 약자에게는 지는 것을 그만둘 때가 패하는 것이다.7
 
 
1) 유대교 제례에 사용하는 전통적인 촛대를 말한다.
2) 서경식, 󰡔고뇌의 원근법󰡕, 박소현 옮김, 돌베게, 2009, 86-87쪽 참조
3) Reinhart Koselleck, Wer darf vergessen werden? Das Holocaust-Mahnmal hierarchisiert die Opfer, Die Zeit, 19.03.1998
4) Paul Celan, ‘Denken und Danken’, Ansprache anlässlich der Entgegennahme des Literaturpreises der Freien Hansestadt Bremen, 1958
5) 후지이 다케시, 「왜 그들은 기업을 폭파했나」, 한겨레, 2014년 8월 24일 참조
6) 이 글에서 인용한 번역은 모두 최성만 옮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폭력비판을 위하여/초현실주의 외󰡕 (발터 벤야민 선집 5), 도서출판 길, 2008에서 가져온 것이다. 중략 및 후략은 인용자. 앞으로는 본문에 쪽수 없이 테제 번호를 괄호로 표기한다.
7)호소미 카즈유키, 「첼란, 김시종, 이시하라 요시로의 언어체험」, 오찬욱 옮김, 실천문학 51, 308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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