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당신은 그 문을 열어 줄 것인가?”

  인간의 윤리의식에 대한 집요한 통찰을 끊임없이 추구해온 감독 다르덴 형제의 열 번째 장편 영화 <언노운 걸>은 위와 같은 물음에서 출발한다. 진료가 끝난 시각, 장래가 유망한 의사 제니는 후배 인턴에게 선배로서의 충고를 늘어놓던 중 병원을 찾아온 누군가의 초인종 소리를 일순간 외면해버리고 만다. 다음날, 제니는 병원 문을 애처로이 두드리던 흑인 소녀가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실종되기 직전에 기록된 병원 CCTV 영상 속 소녀의 마지막 모습을 본 제니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신원미상’의 상태로 죽음을 맞이한 소녀의 이름을 찾아 나서기 시작한다.

  영화의 주인공 제니의 설정은 단출하다. 다르덴 형제는 제니에게 사람을 살릴 수도 있지만 죽일 수도 있는 의사라는 직업의 역설만을 부여했을 뿐, 흔한 전사도 모두 작위적인 과잉일 뿐이다. 최소화된 주인공의 이야기는 다르덴 형제만의 고유한 리얼리즘적 접근으로서 기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언노운 걸>의 엄격한 영화형식은 전적으로 주제의식을 가시화하는 원리로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과시적인 움직임없이 상황을 관조하는 카메라는 불안하게 흔들리며 세계와의 관계에서 결단하려는 캐릭터의 긴장과 갈등을 포착하고, 인물의 시선과 어긋난 세계와 단절적 소외를 관객들에게 여과없이 전이시킨다. 직설적인 핸드헬드 카메라는 절박한 인물의 뒤를 막연하게 쫓는 시선에서 연유한다. 공사 현장의 작업 소리, 도로 위의 자동차 소음과 같은 사운드를 통한 셔레이드와 개성적인 각도의 클로즈업은 영화 속 인물들이 느끼는 정동과 뒤틀리는 분열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일반적인 클로즈업의 의도를 탈피하여 위치한다. 브라이언이 제니를 밀어 제니가 구덩이 속으로 떨어진 장면은 그러한 것의 한 예시로서 카메라는 구덩이 속 제니의 좌절한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것이 아니라, 탈중심화된 클로즈업 구도로 분절하여 제니와 브라이언 모두의 불안한 심리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큐멘터리적 연출에서는 가장 상식화된 영화장치인 음악조차 철저히 배제됨으로써 자칫 헐한 감상주의로 빠질 수도 있는 여지마저 차단해버린다. 관객의 정서에 무한하게 호소하는 부분들을 의도적으로 제거하는 것인데, 서사의 무대가 줄 수 있는 유리감, 즉 현실과 불화하는 이질적 공간으로 비춰질 것을 멀리하기 위하여 영화의 공간을 논픽션물의 연장선인 리얼리티의 배경으로 확장해 나아간다. 인물의 뒷모습과 측면에서 시도되는 독특한 클로즈업 쇼트들은 인물과의 정서적인 동화를 저지시키고 인물의 내면을 헤아리는 이성적 사고 과정으로 확대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인물에 완전한 이입, 동일시를 이루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극명한 거리두기, 구분의 선을 만들지도 못하게 된다. 카메라가 인물 사이에서 동행하고 방황하며 떠도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객 역시 배회하며 다가섬으로써 영화가 던지는 인간 윤리의 근원적인 질문을 더딘 속도로, 그렇지만 생경하게 직시하고 아로새기는 것이다.
 
 
  다르덴 형제의 개별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첨예하게 맞물린 윤리적 쟁점을 주제의식과 영화적 형식으로 구현하는 고유의 스타일을 갖고 있다. 다르덴 형제에게 있어서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는 ‘서로를 잘 알지 못하며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우리들에게 윤리적 관계성을 회복시키는 것에 있었다. 스스로를 “네 개의 눈을 가진 사람”으로 묘사하는 다르덴 형제는 스스로를 반복적으로 타자화시킴으로써 인물과 인물 사이에서, 카메라와 인물 사이에서 적극적인 휴머니티로의 과정을 개진한다. 다르덴 형제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태도를 영화 곳곳에 잠복시켜 렌즈에게도 윤리를 부여하는 존엄한 정신을 굳게 고수한다. 또한 도시라는 잿빛의 영화적 공간 안에서 다르덴 형제의 인물들을 둘러싼 모든 요소들은 각 인물들의 존재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구성된다. 이들의 영화에서는 어딘가 부재를 느끼고 박탈당한 인생을 살아가는 불안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를 담아내는 영상은 위치와 시선까지 촘촘하게 고안된 형식으로써 그들이 그저 타자로 전락하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는 사회적 담론을 생성시키는 계몽의 작업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서 생(生)의 단면에 관한 기록이 된다.

  영화 <언노운 걸>은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 인물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약속>(1996), <로제타>(1999), <아들>(2002)과 같은 다르덴 형제의 전작들과 주된 내러티브의 결을 공유하는 한편, 서늘한 스릴러의 요소를 바탕에 위치시킴으로써 그것과 변별되는 서스펜스적 면모를 담아내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스릴러 장르의 일반적인 관습과 달리 서사의 구축점이 ‘가해자 찾기’가 아닌 ‘피해자의 정체성 추적’에서 출발한다는 것인데, 영상 속 소녀를 바라보며 제니가 흘린 눈물의 의의는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아 원인을 규명하고 죽은 소녀의 억울함을 풀어주리라’는 탐정의 영웅적인 소임이 아니라, 일면식도 없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죄의식을 느끼고 이름조차없이 망각 속에 버려질 소녀를 위해 인간적인 방식으로서의 ‘매장’을 행해주려는 태도에 있다.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을 둘러싼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갈등을 다루는 그리스 비극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서 오빠의 장례를 치르려는 안티고네의 고집스러움은 “명문화되지 않은 자연의 법”, 다시 말해 인간 도덕개념에 대한 “불문율”로서의 절대적 가치성을 함축한다. 인간에 대한 예를 제대로 다한다는 것. 안티고네의 매장 행위는 자연법이라는 의미의 상실을 다시 되돌려 놓으려는 상징적 표지인 것이다. 꽃을 한아름 안아들고서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소녀의 매장지를 기꺼이 찾아 간 <언노운 걸>의 제니는 신중하게 고민하다가 나무 옆의 자리를 고른다. 이름도 없이 그대로 묻혀 버리게 할 수 없다는 무언의 외침을 담대하게 가시화하는 그녀의 행위는 절대성으로 회귀하여 진리적 가치를 수반한다. 안티고네의 명료한 표정. 여기에서 제니가 밝히려 노력하는 소녀의 ‘이름’은 곧 개인의 삶을 회복함으로써 정당하게 정체성을 되찾을 ‘권리’가 있는 한 사람의 존재가치를 표상한다.

  <언노운 걸>을 포함한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는 완전한 악인이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 하다. 다르덴 형제는 굳이 선과 악의 대립과 같은 멜로드라마의 이분법적 인물관과 전통적인 서사구조를 수고스럽게 지양한다. 소녀는 결국 죽었고, 이미 죽은 자이기에 상관이 없다는 여러 인물들의 논리 또한 사실이기에 부정할 수 없다. 거동이 힘든 늙은 아버지를 위해 매춘을 하는 어린 여성을 구해다주곤 했다는 남성도, 아빠를 위해 진실을 말할 수 없던 브라이언의 선택도, 뒤따를 위험으로 인해 친동생의 얼굴을 외면해야만 했던 언니도, 각각의 인물들은 양극단적 유형의 성격이 아니며 저마다의 ‘그럴듯한 사정’을 갖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의 메시지는 더욱 더 상징적인 힘을 얻는다. 예를 들어 제니의 경우를 보자. 제니는 분명 진료시간이 끝난 이후였기 때문에 병원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는 업무에 따른 원칙이기 때문에 합리적이며 납득할 수 있는 행동으로 보여진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소녀의 죽음에는 제니의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병원을 찾아온 누군가의 요청에 응답해야만 하는 의사이다. 진료시간이 일의 효율을 지켜주는 원칙이라면, 환자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의사의 원칙인 것이고 원칙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녀가 병원 초인종을 누르며 문을 두드릴 때, 제니가 인턴과의 언쟁을 벌이고 있던 것은 의사로서의 원칙을 어긴 셈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제니는 간접적인 원인 제공자로서의 죄책감을 느끼고 소녀를 단순 ‘모르는 사람’으로 외면하지 않는다.

  다르덴 형제는 이렇듯 충분히 용인 가능하며 설득될 만한 인물들의 변명 위에 관객을 놓고 마구 흔든다. ‘그럴 수도 있지’, 그들의 핑계거리에 무의식적 수긍을 선언하고 마는 우리의 섬뜩한 얼굴을 읽어낸 후 또 다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당신은 ‘과연’ 그 문을 열어 줄 것인가?”

  <언노운 걸>의 이러한 함의는 같은 맥락에서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과 맞물린다. 우리는 “누구나 들어봤지만 아무도 본 적은 없는” 이른바 ‘착한 자본주의’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59살의 노동자 다니엘 블레이크는 솜씨 좋은 목수이지만, 위선적인 복지제도와 부조리한 형식과 절차 아래선 그저 병력의 소유자, 다시 말해 개인 역량의 결함으로 일을 할 수 없는 무능한 늙은이일 뿐이다. 주치의가 업무 불가 판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어처구니없는 질문들로 의료수당 심사에서 탈락하고 빈곤을 피하려면 구직을 해야만 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 혼자 힘을 써야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우리사회의 ‘부지런한 일꾼’인 것이다. 펜과 종이가 친숙한 그에게 컴퓨터를 통한 복잡한 신청제도는 너무나 잔인하다. 그러나 구직센터의 관료제 시스템은 이를 헤아려주지 않는다. 급기야 절차상의 대안은 손글씨로 점철된 종이 한 장이 아닌, 완벽한 형태를 갖춘 이력서를 만드는 법을 배우라며 그를 이력서 ‘교육’ 특강으로 안내한다. 사회구조의 불합리성을 개인의 문제로 재단하여 환원하고 왜곡하는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 두 영화는 이러한 문제가 개인의 역량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명목만 있는 허울 안에 우리 사회의 수많은 ‘다니엘 블레이크들’과 ‘언노운 걸들’이 얼마나 모순적인 방식으로 복지의 사각지대에 밀려나 있는지를 환기시킨다. 다르덴 형제와 켄 로치는 절박하고 초라한 이들의 인생에서 살아있는 인간적인 연민과 휴머니티의 형형한 시선을 비추어 낸다. 다니엘 블레이크는 미혼모 케이티를 위해 정성스레 책장을 만들어 선물할 줄 알고, 제니는 소녀의 이름을 되찾아 언제든 소녀의 가족이 찾아올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윤리적 공동체의 가능성을 표현한다. 두 영화는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를 향한 가장 고귀한 저항이 된다. 효율만을 강조하는 시스템의 철칙 앞에 내던져진 낯선 이에게 손을 내밀고 공감할 줄 아는 태도는 여전히 강한 생명력으로 꿈틀거린다. 타인으로 향하는 행위의 근거가 개인적 이익과는 전적으로 무관하기 때문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블랙아웃된 오프닝 시퀀스에서 느껴지는 다니엘 블레이크의 답답함은 <언노운 걸> 속 소녀의 이름 찾기 과정에서 의아함과 위협으로 숨막히던 제니의 그것과 다름 아닌 것이다. 두 영화 모두 “우리는 다른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해야만 한다”는 켄 로치의 제언을 은유한다.

  <언노운 걸>에서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제니의 행동이 가장 절대적이면서도 보편적인 휴머니티를 시사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타자에 대한 관심과 개인적 욕망이 충돌하는 자리에 위치해서 있으면서도 애써 타자의 존재를 껴안으려는 마음. 다르덴 형제는 제니에게서 인간성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경외를 조명한다. 경찰도, 형사도 아닌 제니가 실제로 만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소녀에게 느끼는 방식은 죄책감이라는 최소한의 감정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윤리의식으로 점증된다. 인간의 또 다른 감각기관이라는 감정이라는 것은 사고의 결과가 아니다. 일차원적 감정인 도덕적 죄의식이 ‘언노운(Unknown) 걸’의 이름을 밝히기 위해 나서는 제니의 행동을 개인적인 단계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의 윤리의식으로 열리는 과정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때 제니가 느끼는 죄책감은 바꾸어 말하면 타인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다. “정서적 조우”를 통한 타자와의 관계 맺기 과정으로 이르는 것이다. 실제로 다르덴 형제가 그들의 영화적 자서전을 통해 본인 영화의 기본토대가 레비나스의 타자성 개념으로부터 인용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듯이 다르덴 형제의 영화세계는 “타자와의 대면(face-à-face)”을 통한 윤리관으로 응집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레비나스의 타자는 <언노운 걸>의 곳곳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제니의 병원을 찾아오는 혼자 사는 노인들에서부터 불법 체류 환자들을 비롯하여 소녀의 죽음이 일어난 공사 현장의 노동자들까지, 심지어는 카메라 바깥에 머무는 인물들조차도 사회적 타자들이다. 이미 사회안전망의 사정거리에서 고립되어버린 그들에게는 감정없이 쌩쌩 달리는 도로 위 차들의 오프 사운드가 전하는 공격과 고립을 피하려는 때, 제니가 문을 열어줘야만 들어갈 수 있는 병원의 공간이 필요하다. ‘언노운 걸’은 내몰린 채 자신의 ‘진짜 이름’을 덮고 은밀한 매춘 행위를 하며 살아가야만 했던 가봉 출신의 소녀였다. 중심부에 속하지 못한 채 어둠의 사회에서 밑바닥을 전전하는 이들은 보호받지 못한다. 그리고 다르덴 형제는 이러한 타자들에게 결단코 관객들의 ‘동정’을 덧입히려 하지 않는다. 연민의 정서를 구걸하지 않음으로써 동정을 통한 관객의 동일시를 적극적으로 꺼리는 것이다. 다르덴 형제는 이것을 본인의 목적이 타자들에 대한 관객의 동정심이 아니라,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의 권리를 인식하게 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밀려난 주변부의 타자들은 다르덴 형제의 영화 속에서만큼은 중심부에 자리하게 된다. 다르덴 형제는 그들의 상황을 밀착하게 감각하고 보고함으로써 현대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는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문제는 사회구조적인 폭력으로 고발된다. 제니의 병원을 찾은 환자 중 한 명은 긴급한 치료가 요구되는 심각한 환부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정한 신분이 탄로날까 두려워 “큰 병원은 절대 안돼요.”라는 말만 반복한다. 1분에 가까운 롱테이크 쇼트들은 인공적인 서사라인을 거부하고 음향과 음악을 자제하는 것과 더불어 자연광 촬영으로 ‘지금-여기’ 사실감의 세계 안에 관객들의 시간을 포개어 놓는다. 관객은 직관적으로 체험한다. 나는 지금 픽션이 아닌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일수도 있노라고. 카메라의 움직임에 대한 리얼리즘 전략은 모두 “타자에게 손을 내미는 행위”의 과정으로서의 시도이며, 관객들은 인물들의 상호작용을 지켜보며 그들의 입장을 인식하고 배타적 시선을 전복시킴으로써 우리의 이야기로 사고하게 되는 것이다.

  제니가 자아중심만의 경계를 허물고 소녀의 죽음에 관련된 단서들을 찾아 나서며 소녀의 이름으로 향함으로써 열리는 대면 과정은 그 자체로 인간의 기본적인 태도와 맞닿는 윤리적 주체의 탄생을 시사한다. 레비나스에게 ‘나와 타자와의 관계’에서 “윤리란 책임”1을 의미하는 것이며 “책임의 관계란 타자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2으로 언급된다. 이 때 레비나스는 책임을 “타자의 부름에 의해 촉발”3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는 언제나, 즉 자아의 영역 이전에 있음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나’는 부름 이전에 근원적인 책무를 다해야 하는 상태로 남아있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도덕적 죄의식이자 윤리적 부채의식이 제니로 하여금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하게 하고 지속적으로 깨어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 때의 도덕적 죄의식은 종교적 층위의 의미가 아니다. 타자의 존재를 나로부터 배격하지 않고 나와 완전한 동화를 이루지 않는 그 경계적 선 상에서 도덕적 죄의식은 나와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의 본질이 된다. 내가 빚지고 있는 타자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윤리적 연대 방식은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나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비단 선험적 존재인 타자에 대한 나의 수용만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선행되는 ‘타자의 도움’으로 나의 세계가 온전한 의의를 얻는다. 이런 점에서 소녀에 의해 본인의 세계를 깨고 나올 수 있었던 제니가 도리어 과거의 트라우마로 의사의 꿈을 포기한 후배의 세계를 열어준다는 것은 나와 타인의 관계 속 결속력이 선사하는 어떠한 영향력에 대한 암시로서 이해할 수 있다. 타자의 재현은 다르덴 형제의 주도면밀한 영화형식을 통해 이와 같은 특성으로 구축된다. 타자에 의해 깨어 있는 삶을 그림으로써 나와 타자와의 관계에 근간할 기본적인 태도와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언뜻 보면 사소해 보이는 도덕적 죄책감일 뿐이지만 제니는 그것을 결과에 대한 합리화의 구실로 삼지 않는다. 기본적인 양심에서 비롯된 이런 노력은 궁극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를 긍정하며 또한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가치로 발산된다. 마침내 소녀의 이름을 되찾은 제니는 그녀를 찾아온 소녀의 언니를 감싸 안고, 포용한다. 아마 이것이 제니의 삶에 있어서 드라마틱한 변곡점으로 투영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누군가의 존엄을 견지하기 위해 윤리적 책임을 다하고 담담히 돌아서는 제니의 뒷모습을 목격한다. 그녀는 여전히 타자의 옆을 지키고 선다. 이 때 연대의 메타포는 <언노운 걸>의 솟구치는 생동감이 끝끝내 살아 움직이는 근거이자 새로움의 기제로서 다르덴 형제의 숭고한 영화미학으로 귀결된다.

  다르덴 형제의 <언노운 걸>은 결국 휴머니티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사회의 경시된 인간성과 계량화되어버린 기저에 대한 다르덴 형제의 세밀한 천착은 절대적인 보편성을 내재한다. 이 영화는 우리의 옅어지는 도덕적 죄의식을 향하여 날카롭게 움직인다. 시스템의 모순과 불온한 날 것을 관계한 뒤, 궁극의 본질성을 응시한다.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가 상실된 자리를 지배하고 있는 무책임함을, 윤리의 결여를 파고든다. 피부색과 신분, 종교적, 법적 이데올로기를 허물고서 소녀의 이름에, 이미 끝나버린 문제 속 생애의 존엄에 온전한 집중을 다 할 수 있을 것인가? 타자와의 관계 맺기를 연속하는 사회적 개인으로서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 <언노운 걸>의 주제의식과 영화미학은 이러한 질문들로 프레임 밖에서 본격화될 것이다. 단순한 무게를 감히 매길 수 없는 생명들에 대하여 누군가는 여전히 이미 끝난 죽음이라는 ‘현실주의적 입장’을 내세울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현재의 한국사회를 투시하는 것만 같은 낯설지 않음에 끝없이 자문하게 하는 <언노운 걸>의 뒷모습은 이에 선명하다.

1) 김도형, 「레비나스 철학의 사회철학적 함의-레비나스의 윤리와 정치」, 『대동학회』 50, 대동철학회, 2010, pp.99-125.
2) 위의 글.
3) 위의 글.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