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시대는 ‘혐오의 시대’라 부른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혐오의 화살이 성별, 나이, 성 정체성 등을 가리지 않고 불특정 다수에게로 향하고 있죠. 혐오는 우리의 일상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기도 합니다. ‘XX충’과 ‘극혐(극도로 혐오함)’이라는 표현은 혐오를 가벼운 농담으로 일반화시킨 사례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과연 사회에 만연해 있는 혐오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을까요?

  사람들이 누군가를 혐오하는 데에는 다양한 핑계가 있을 겁니다. 가치관이나 종교적인 신념의 차이에서부터 미지의 영역에 대한 두려움까지. 백 가지 혐오가 존재한다면 거기엔 백 가지가 넘는 변명이 뒤따르죠. 혐오는 개인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규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혐오를 사회에 표현하고 이를 사회에 반영하려는 시도는 결코 개인의 영역이 아닙니다. 사회 전체를 위협할 수 있는 문제가 되죠.
 
  “소수자의 인권을 침해할 생각은 없지만 그냥 싫은 걸 어떡해.” 사람들은 가치관이나 종교뿐만 아니라 성별이나 인종과 같이 생득적인 요소를 향해서도 거침없이 혐오를 표현합니다. 그들은 표현의 자유라는 허울 안에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을 뿐 소수자의 인권을 침해할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혐오 표현 자체가 지니고 있는 폭력성에 대해선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혐오하는 것은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기 때문이죠. 그 영역을 다른 것이 아닌 틀린 것으로 보는 혐오 표현은 자유가 아닌 폭력으로 규정해야 합니다.
 
  또한 자의적인 혐오 표현을 권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표현의 자유를 왜곡합니다.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고 있기 때문이죠. 세계인권선언 제29조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혐오 표현은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비방하는 폭력에 해당합니다. 폭력을 정당화하는 권리는 민주주의 사회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혐오 표현이 개인적인 피해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인 문제로 확대될 수 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잘못된 논리를 바탕으로 한 개인의 혐오 표현은 편견을 만들고 이는 소수자를 향한 낙인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소수자를 비정상으로 취급하는 사회 풍조가 고착화되는 것이죠. ‘급식충’, ‘틀딱이’, ‘뽈록이’, ‘게이샷’ 같은 단어들이 소수자를 웃음거리로 전락시켜 소비하듯 말입니다.
 
  혐오가 갖는 위험성에 비해 ‘그냥’이라는 이유는 너무 무책임해 보입니다. 상대의 존재 자체를 혐오하는 이유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이기 때문이죠. 혐오를 당연시하는 태도는 사유를 포기한 것입니다. 잘못된 논리를 기반으로 고착화된 편견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성찰뿐입니다. 굳어진 편견과 스스로의 표현을 꾸준히 생각하고 반성하는 것만이 혐오 시대의 막을 내릴 수 있는 방법입니다.
 
김예령
기획부 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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