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하는 것, 내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내가 말하고 있다고 믿는 것, 내가 말하는 것, 그대가 듣고 싶어 하는 것, 그대가 듣고 있다고 믿는 것, 그대가 듣는 것, 그대가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 그대가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 것, 그대가 이해하는 것, 내 생각과 그대의 이해 사이에 이렇게 열 가지 가능성이 있기에 우리의 의사소통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 해도 우리는 시도를 해야 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 사전』속 ‘시도’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글에는 두 가지 시사점이 있는데 첫 번째는 소통이 무척이나 어렵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럼에도 소통은 시도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지난 1892호 ‘점거하는 대학생’ 기획을 담당하며 이 소통의 두 가지 면모에 대해 혹독하게 고민해야 했다.
 
  지성인들이 모인 대학에서도 소통은 어려웠다. 대학본부와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테이블만 있었다면 수천 명의 대학생은 그 시간과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있었다. 견해 차이, 학칙, 결정 구조 등 구성원 간의 소통을 가로막은 것들은 쉽사리 뚫리지 않았다.  
 
  하지만 소통은 정말 그럼에도 시도할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선 의문이었다. 점거하는 대학생 기획을 하면서 ‘점거하지 않는 대학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서울대에 재학 중인 한 친구가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며 남긴 말이 화근이었다.
 
  “난 그런 거 안 해. 하루 이틀 일어난 일도 아니고 어차피 점거 농성한다고 철회될 일도 아니더라고. 빨리 졸업이나 해야지.” 놀랍게도 설득력 있었다. 실제로 점거하는 대학생보단 점거하지 않는 대학생이 대다수다. 점거하지 않는 대학생들은 ‘해봤자’, ‘어차피’ 라는 단어를 공통적으로 사용하며 점거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들 말처럼 구태여 힘들이며 주장하지 않더라도 쌍방 간의 소통을 포기하면 적어도 개인의 삶에선 끝날 일이었다. 
 
  점거하는 대학생이 불통에 소통으로 대응했다면 점거하지 않는 대학생은 불통에 냉소로 대응했다. 냉소는 상대방으로 인해 받게 될 실망으로부터 미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다. 지속적인 대학본부의 통보적인 행정을 경험한 이들은 더 이상 대학본부에 신뢰와 변화를 기대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해봤자’, ‘어차피’라는 체념적인 단어에서 이들의 방어기제가 잘 드러나고 있었다.
 
  점거하지 않는 대학생을 이해할 수도 이해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러나 냉소를 기피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의 냉소를 반길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무관심으로 표현된 냉소가 전제될 때 누군가는 원하던 일을 막힘없이 진행할 것이고 이는 결코 우리가 바라던 바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냉소를 기피해야 할 이유가 소통의 당위가 되긴 어렵다. 어쩌면 소통을 시도해야만 하는 당위는 없는 듯했다. 그러던 중 취재를 위해 뽑아 놓았던 기사 중 ‘이화여대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이화여대 학생들의 대학 점거로 예상치 못했던 사회적 변화가 줄줄이 일어났다는 말이다. 이처럼 시도는 결과를 알 수 없을 때 이뤄진다. 운이 좋게 성공할 수도 운이 나빠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소통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시도 자체와 시도하는 스스로를 믿어서였다.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은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다음 날 청년들에게 연설을 남겼다. “절대 냉소에 빠지지 마십시오. 변화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맞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설득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동료 시민들에 대한 믿음과 함께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런 믿음이야말로 활기찬 민주주의를 이루는 핵심입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사회는 우리에게 완벽한 믿음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믿음을 주지 못한 사회는 규탄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사회의 변화를 위해 소통을 시도하는 것 그리고 이전에 그 시도에 스스로 믿음을 걸어보는 것은 대학생이 해봄 직한 일 아닐까.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