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이가 돈다. 팽이가 계속 돌고 넘어지지 않으면 이 세계는 현실이 아니다. 내가 느끼는 모든 것이 현실과 다름없지만 현실이 아니다. 영화 <인셉션>에서 주인공 콥(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은 자신이 걷는 세계가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하기 위해 토템을 굴린다. 인간의 지각으로는 구분이 불가능해서 정교하게 만들어진 물건의 힘을 빌린다.
 
  <인셉션>은 꿈과 현실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현대 기술로 만들어진 가상세계도 마치 꿈과 같다. 그 속에선 현실과 구분이 십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가상세계는 가상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가상세계인 '매트릭스'의 죽음이 실제 죽음으로 이어지듯 가상세계는 현실에 스며들며 더 가까워지고 있다. 그만큼 가상세계는 우리에게 더 큰 영향을 줄 것이다.
 
  가상세계에 대한 철학적 탐구
  “철학적 관점으로 보면 우리가 사는 실제 현실도 가상세계일 수 있습니다. 그 방식이 다를 뿐 현실이 가진 가상세계적 특징은 과거부터 논의돼 왔죠.” 이재호 교수(철학과)는 가상과 실재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고대부터 존재했다고 설명했다.
 
  가상세계를 말한 대표적인 철학자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다. 그는 동굴에 비친 그림자 우화를 통해 우리가 사는 경험적 세계가 실재(實在) 세계인 이데아를 모방한 가상세계라고 말했다. 이런 논의는 ‘시뮬라시옹(simulation)’ 개념 등을 창안한 장 보드리야르 등으로 현대까지 이어진다.
 
  이재호 교수는 특히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를 강조했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것에 의문을 던진다. 존재와 진리에 대한 데카르트의 탐구는 현실과 실재에 대한 회의(懷疑)로 이어진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데카르트의 유명한 선언은 이러한 맥락에서 탄생했다.
 
  실재에 대한 데카르트의 논의를 현대적으로 풀이한 ‘통속의 뇌’ 비유는 이미 유명하다. 뇌가 인간의 몸 속이 아닌 통 속에 들어있다. 컴퓨터와 연결된 전기 회로가 뇌와 연결되어 있고 뇌는 외부와 통제된 상황에서 컴퓨터가 보내는 신호를 실제라고 믿는다.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가 모두 허구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래 최첨단 가상세계는 사변적 환상에서 현실로 내려왔다. 우리는 머지않은 미래에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가상세계를 체험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가상과 실재 사이 경계를 점차 허물어뜨린다. 이러한 상황은 궁극적인 실재를 논의한 전통적 철학에 새로운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왜 가상세계를 찾는가
  여느 상품이나 기술과 마찬가지로 가상세계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이용자의 선호와 수요가 뒤따랐기 때문에 가능했다. 허지원 교수(심리학과)는 사회가 가상세계를 선호하는 이유를 어린아이에 빗대어 설명했다. “어린아이가 공룡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공룡이 이미 사라졌다는 걸 알기 때문이에요. 자신을 해치지 못할 것을 아는 거죠. 가상세계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가상세계가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무의식에 알고 있어요. 그렇다 보니 방어 태세나 불안을 내려놓고 가상세계에 자아를 대입할 수 있죠. 그 속에서 이용자는 높은 몰입감과 쾌감을 경험할 수 있어요.”
 
  이종관 교수(성균관대 철학과)는 현대인이 가상현실에 빠져드는 이유를 가상현실 자체가 아닌 실제 세계에서 찾았다. 사람들은 현실의 모순을 잊기 위해 현실에서 체험할 수 없는 쾌감을 가상세계에서 충족한다. “사람들이 가상세계에 빠져드는 현상은 그만큼 현실의 삶이 괴롭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우리가 몸담은 실제 세계가 모순으로 가득 차서 가상세계로 도피하려는 것이죠.” 부조리한 사회는 사람들의 불만을 증폭시킬 뿐만 아니라 개선의 의지를 포기한 채 가상현실을 탐닉하게 한다.
 
  실재 속 가상의 역할
  허지원 교수는 가상세계의 순기능을 강조했다. “VR 기술을 이용한 심리치료는 현재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어요.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사회공포증, 특정공포증과 같은 불안과 관련한 정신질환에선 중요한 임상적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은 AR과 VR 기술을 통해 물리적 구속을 극복할 수 있다. 이를 이용한 의학·항공·군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미 가상세계 기술의 효과가 증명됐다.
 
  하지만 가상현실 기술이 일상에 본격적으로 도입되면 여러 사회문화적 파문을 일으킬 수도 있다. “사회적 모순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술적 발전만 이루어진다면 해당 기술이 현실도피의 수단 등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것은 현실의 모순과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는 악순환의 고리를 이어갈 뿐이죠.” 이종관 교수는 현실 문제를 해결해야만 올바르게 기술을 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면 죄의식 없이 비윤리적으로 행동하거나 현실도피를 할 수 있다. 가상세계에서 인간은 다른 성별이 되거나 다른 종족이 돼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가상세계의 장점일 수 있지만 위험성도 지닌다. 가상세계의 유동적인 자아 정체성은 다양한 형상으로 재구성되면서 실제 자아의 혼란과 분열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 맺음의 첫 단계 ‘고민’
  기술은 사용자의 판단에 영향을 받는다. 가상세계가 초래할 수 있는 문제들을 예방하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술에 대한 성찰이 중요하다. 때문에 우리는 자신과 관계 맺는 세계와의 균형과 기술의 방향성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인간과 기술 사이에 올바른 관계 맺기가 필요해요. 인간이 기술에 지배당하는 전도 현상을 경계하고 기술의 방향성을 잘 잡아 나가야 합니다.” 이승종 교수(연세대 철학과)는 기술 발전 이전에 성찰이 있어야 무분별한 추종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기술에 대한 반성적 접근,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과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기술을 이용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인간을 중심에 둬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겁니다.”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