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듯 이어져 온 관습
‘원래’라는 나태함
 
  톨킨의 소설 『호빗』을 포함한 많은 서양 판타지에서 드래곤은 교활하고 사악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이는 기독교가 성행했던 서양에선 드래곤을 뱀의 이미지와 결부시켜 사탄 취급을 했기 때문이죠. 서양 신화에 기반한 판타지 세계관엔 서양의 문화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판타지의 여러 요소들은 ‘원래’ 그런 것도, 혹은 ‘그냥’ 그렇게 된 것도 아닙니다. 모든 요소는 그 각각의 맥락을 지니죠. 드래곤은 사악하다는 관습적 서사가 개연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러한 본질적인 맥락이 존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양 판타지 세계관이 우리나라로 들어왔을 때는 그러한 맥락이 사라졌습니다. 자신들의 이야기인 만큼 자연스레 맥락을 체득했던 서양과 달리, 우리나라에서 그 맥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고민이 필요했죠. 하지만 고민의 과정은 생략됐고 결국 본질을 가져 왔다기보단 드래곤, 엘프 등 서양 판타지의 관습만을 가져다 쓴 것에 불과하게 됐습니다. 드래곤이 사악하다고는 하는데 그 이유는 없는 거죠. 관습만이 존재하는 한국에서의 서양 판타지는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한 채 ‘양산형 판타지 소설’이란 오명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난 1889호 시사기획부에서 다뤘던 사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1970년대 대학가가 권위주의를 들여온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군사정권에 대항해 학생운동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도 권위주의란 관습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결국 수많은 일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에도 그저 ‘관습이라서’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관습은 사회구성원 간 그순간의 합의를 통해 생성됩니다. 무언가 관습으로 굳어지기 위해서는 다수가 동의할만한 이유나, 맥락이 필요하죠. 하지만 이 합의가 정당하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당시의 맥락에선 어쩔 수 없는 합의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맥락이 현재에도 유효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관습은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시공간에 따라서 그 의미를 잃기도 하죠.
 
  문제는 맥락이 변하더라도 한번 생긴 관습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관습은 당연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죠. ‘원래 그렇다’는 말은 더 이상의 논의를 차단합니다. 관습의 달콤한 거짓말은 예전에 있었을 그 합의를 나태하게 믿게 할 뿐, 이것이 왜 이렇게 됐으며 왜 필요한지에 대한 고민을 앗아가죠.
 
  하지만 앞서봤듯 관습은 결코 달콤하지만은 않습니다. 언제고 무의미해지거나 악습이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죠. 관습에 대한 지속적인 경계와 비판의식은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이 과정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당연했던 것들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는 순간 고민해야 할 것이 수없이 많아지니까요. 하지만 관습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은 고민의 피로함 따위보다 훨씬 더 큽니다. 관습들은 악습이 돼 우리 스스로를 망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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