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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그 일상적인 환상
권희정 기자  |  kkhj41@cau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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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3.06  07:2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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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 파올로 우첼로 作, 1455~1460년경) 속 기사가 성 게오르기우스다. 게오르기우스는 초기 기독교의 순교자이자 14명의 성인 가운데 한사람이다. 그는 중세 유럽 때 널리 알려진 「황금전설」에 묘사됐다. 게오르기우스는 리비아의 작은 나라 시레나에 나타난 용을 무찔렀지만, 당시 로마 황제의 박해로 고문 받다 참수형을 당했다.
 
환상(幻想). 우리는 하늘을 날며 불을 뿜는 드래곤과 중원을 차지하기 위한 협객들의 칼부림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이내 우리는 서양판타지소설과 무협소설을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로 치부하죠. 하지만 모든 환상은 우리의 모습이 담긴 거울이 아닐까요.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은 “판타지는 현실의 극한적인 왜곡이다”고 말했습니다. 판타지는 비현실적 요소로써 현실의 문제의식을 부각시킨다는 것이죠. 실제로 중국의 무협소설들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반발로서 창작되기도 했죠. 이번 학술기획에서는 동·서양이 전하는 ‘환상소설’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신화는 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

껍데기만 쓰는 양산형 
판타지 소설, 이제 바뀌어야
 
환상(fantasy)의 정의는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이다. 여기서 방점은 ‘현실적인 기초가 없다’에 찍힌다. 판타지는 현실에 기반하지 않는 만큼 어느 방향으로 또 어떤 방식으로 나아갈지 전혀 예상할 수 없어야 한다. 하지만 여러 컨텐츠에서 나타나는 판타지 세계는 마치 현실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묘사한 것처럼 공통점을 지닌다. ‘판타지는 이렇게 써야 한다’고 협약이라도 체결된 걸까. 왜 그들은 이토록 비슷하게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왜 그 이야기들에 늘 열광하는 것일까.
 
  톨킨이란 신화를 말하다
  소설 『타라 덩컨』이나 게임 ‘리니지’,‘마비노기’ 등 서양을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 서사는 세계관을 공유한다. 그곳엔 마법이 존재하고 숲속에 사는 아름다운 엘프나 키는 작지만 손재주가 뛰어난 드워프, 입에서 불을 뿜는 드래곤 등이 공존한다. 이는 소설, 영화, 웹툰, 게임 구분할 것 없이 판타지 서사에 존재하는 지대한 클리셰다.
 
  이 세계관을 정립한 것은 판타지 계의 신화라고 불리는 존 로날드 로웰 톨킨(J.R.R.Tolkien)이다. 톨킨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친숙한 작가다. 그의 저서로는 소설 『호빗』, 『반지의 제왕』, 『실마릴리온』 등이 있다. 그 중 『반지의 제왕』은 『나니아연대기』, 『어스시연대기』와 함께 세계 3대 판타지 문학 중 하나로 손꼽힐 뿐 아니라 전 세계 책 중 4번째로 많은 판매량을 자랑한다.
 
  톨킨은 그의 저서를 통해 판타지 세계관의 기틀을 잡았다. 엘프는 뾰족한 귀를 가지고 있고, 트롤은 큰 몸집에 단단한 피부를 가진 괴물이며 드워프는 술을 좋아하는 호탕한 종족이란 고정관념들은 톨킨의 산물이다.
 
  신화가 낳은 판타지의 신화
  톨킨의 세계관은 북유럽 신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엘프와 드워프는 각각 북유럽신화의 알프(Alfr)와 드베르그(Dvergr)에서 가져와 변형한 것이며 마찬가지로 불을 뿜어대는 드래곤이나 늑대의 형상을 한 와르그(Vargr)도 북유럽의 신화 속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소설의 배경이 되는 ‘가운데 땅(Middle-earth)’ 또한 북유럽신화에서 인간들이 사는 세계를 뜻하던 미드가르드(Midgard)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신이나 죽은 자의 세계 등 여러 세계를 전제하고 ‘중간계’에서 펼쳐지는 일을 담아내는 판타지 클리셰의 시작 또한 이곳이었다.
 
  톨킨의 대표작인 <반지의 제왕>의 ‘절대 반지’도 북유럽신화의 지크프리트 전설 속에 등장하는 안드바리의 반지와 유사하다. 안드바리의 반지는 재물을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졌지만 반지를 낀 모든 이들을 죽음으로 이끈다. 이 반지는 톨킨의 소설에서 소유주에게 강대한 힘을 주지만 끝내 타락하게 만드는 ‘절대 반지’로 변모한다.
 
  환상은 신의 이야기를 노래한다
  세계관 정립에 있어 북유럽신화를 차용한 것은 비단 톨킨뿐만이 아니다. 롤플레잉 게임(RPG)의 시초이며, 톨킨 다음으로 보편적인 판타지 세계관 정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 테이블 롤플레잉 게임(TRPG)인 ‘던전 앤 드래곤스(D&D)’도 북유럽 신화 속 존재들을 기본으로 한다. 대부분의 서양 판타지는 톨킨과 ‘D&D’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를 감안하면 판타지의 장르적 관습 대부분은 거의 북유럽 신화를 기반으로 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북유럽 신화만이 판타지 서사에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나 아일랜드 신화와 같은 유럽의 다른 신화들도 판타지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차용된다. 『나니아 연대기』에 등장하는 소머리에 인간의 몸을 한 미노타우로스나 인간의 머리에 말의 몸을 한 켄타우로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괴수다. 또한 『해리포터』 속의 죽을 사람을 통곡으로 알린다는 반시나 초록모자의 장난꾸러기 레프러칸도 아일랜드 신화의 요정이다. 다양한 신화들이 판타지의 초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가장 오래된 가장 새로운 것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할 것 같은 판타지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노래하고 있었다. 신화적 요소는 어떻게 이토록 오랜 기간 사람들의 흥미를 끌 수 있었던 것일까. 문화인류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이경덕 강사(교양학부)는 신화가 인간이 고민했던 모든 것들의 뿌리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신화에는 이 세상은 무엇이고 또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오랜 고민이 담겨있어요. 현대에 이르러서도 인간이 근원적으로 고민하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죠. 시대에 따라 형태를 달리할 뿐 그 구조는 같아요.” 신화에 담긴 인간의 근본적인 고민은 언제까지나 유효하다. 때문에 신화에 시선이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경덕 강사는 신화나 판타지 속 환상은 우리 삶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설명했다. “모든 환상은 우리를 비추고, 비추기 위해 존재해요. 신화에서 얘기하는 신과 괴물들에도 결국 우리 모습이 담겨있죠.” 현재 우리를 비추는 ‘판타지’에 오랫동안 인간을 비춰온 ‘신화’가 포함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서양을 비추는 한국의 거울
  환상이 비추는 것이 ‘우리’라면 한국의 판타지는 ‘우리’ 한국을 비추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판타지는 우리나라가 아닌 서양을 담아내고 있었다. 현재 한국 창작 판타지 소설을 말하기 위해서는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를 빼놓을 수 없다. 이 작품의 성행으로 우리나라에서 판타지 소설이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래곤 라자』 또한 톨킨과 ‘D&D’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톨킨이 자체적으로 창작해낸 ‘호빗’이나 ‘발록’과 같은 종족이 소설에 등장하고 ‘D&D’의 주문이나 아이템도 거의 그대로 작중에 사용됐다. 때문에 10주년 개정판에선 저작권법에 위배되지 않기 위해 종족의 이름을 바꿔 출간하는 해프닝까지 있었다.
 
  『드래곤 라자』는 재미는 물론 철학적 사색까지 담겨있어 세계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드래곤 라자』 이후 많은 출판사들이 판타지 장르에 뛰어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톨킨과 D&D는 물론, 『드래곤 라자』까지도 답습한 천편일률적인 세계관에 독자들이 이렇다 할 매력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 탓에 한국 판타지 소설의 위상은 ‘양산형 판타지 소설’이란 신조어를 낳으며 추락했다.
 
  이경덕 강사는 한국 판타지 소설이 오명을 쓰게 된 원인으로 서양 판타지의 무분별한 모방을 꼽았다. “우리나라에서 쓰이는 서양 판타지의 요소들은 본질을 이해했다기보다는 명사만을 가져다 쓰는 것에 가까워요. 그 종족이 왜 그런 성격과 특성을 가지게 됐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이 껍데기만 가져다 쓰는 거죠.” 본질과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 채 쓰인 콘텐츠는 깊이를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적인 판타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떨까. 애석하게도 그런 서사는 매우 드문 상황이다. 이에 대해 이경덕 강사는 한국 신화의 발굴 자체가 미비하다고 지적했다. “원석은 세공해야만 빛을 낼 수 있어요. 마찬가지로 신화의 구조와 본질을 제대로 알고 그 의미에 대한 분석이 선행돼야만 그걸 가지고 이야기를 만들 수 있죠. 그런데 우리나라의 신화는 세공은커녕 발굴되지도 않았어요.” 의미화를 넘어 그 본질을 통한 문학화까지 이뤄진 서양과 달리 우리나라의 신화는 의미화 작업조차 이뤄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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