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아침이 밝기 전인 새벽 4시. 가장 먼저 시장을 여는 이가 있다. 채소가게 아저씨도 아니고 정육점 아주머니도 아닌, 바로 스님이다. 서울시 은평구 갈현동 역촌중앙시장에는 ‘열린선원’이 있다. 매일 상인과 손님이 오가는 분주한 시장에 위치한 고요하고도 작은 사찰이 오묘하게 잘 어울린다. 적막한 산기슭보단 북적북적한 시장에서 진정한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한다는 법현스님을 만나봤다.

 
  역촌중앙시장 건물 2층에 올라서니 작은 교회가 있다. 이를 지나쳐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도를 이뤄가는 10단계 과정을 담아낸 ‘심우도’(尋牛圖) 벽화가 보인다. 그림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시장 거리에서 가르침을 전한다’는 의미를 담은 ‘입전수수(入廛垂手)’ 단계에 다다르고 마침내 열린선원이 보인다. 허름한 문을 열고 사찰에 들어서자 인자한 미소를 띠고 합장을 한 법현스님이 신도들을 맞이하고 있다. 
 
  “한 세미나에서 중앙대 동문 목사님을 만났어요. 인사를 건네며 전 ‘중대’ 나왔다고 말했더니 그 목사님이 자신은 ‘중~앙대’를 나왔다는 거 있죠.(웃음)” 스님과의 만남이기에 왠지 무거운 인터뷰가 될 거란 기자의 예상을 깬 법현스님의 첫인사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나 오갈 법한 유머를 건넨 그는 ‘중앙대’ 출신 ‘중’이다. 

  -스님도 농담을 하는가. 
  “스님도 사람들과 재밌게 살고 싶어요.(웃음) 농담도 할 줄 알아야 불교의 본질을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죠. 전 유머를 아는 스님이 되고 싶답니다.”

  -법현스님과 함께라면 불법 공부도 재밌겠다.
  “그런가요. 안 그래도 불교를 재밌게 알려주기 위해 레크리에이션 자격증도 취득했어요. 자. 따라 해봐요. ‘차차차 찻잔 위에 뚜껑이 없네….’ 기자님 재미없어요? 저 이래 봬도 YMCA 출신 스님인데.(웃음) 스님 최초로 『놀이 놀이 놀이』라는 레크리에이션 책도 썼어요.”

  -아니다. 유쾌하다. 레크리에이션 자격증과 책이라니.
  “전 불교가 좋은 공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데 주변에선 고리타분한 종교라고 생각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불교에 대해 재밌게 알려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 레크리에이션 자격증도 취득하고 책도 쓰게 됐죠.”

  -저잣거리에서 포교활동을 한 지 12년이 지났다고.
  “벌써 그렇게 됐나요. 많은 신도들이 ‘스님, 왜 산으로 가지 않고 저잣거리에서 수행하시나요?’라고 묻곤 하죠. 그럴 때면 전 ‘조용한 곳에서의 수행보다 시끄러운 곳에서 한 수행은 더 단단하지 않겠습니까?’라며 반문하곤 해요. 사람들이 오가는 시장이야말로 수행하기도 좋고 수행으로 얻은 것들을 나누기 적합한 장소죠.(웃음)”
 
  -그래도 불경을 외우긴 힘들겠다.
  “군중 속에 고독이 있듯이 시끄러움 속에도 고요함이 존재해요. 상인들이 문을 닫은 새벽엔 시장만큼 조용한 곳이 없죠. 그래도 10여 년 넘게 그들과 동고동락했기에 마이크, 악기 소리를 조금 내더라도 이해해주는 편이예요. 상인들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들보다 일찍 하루를 여는 스님의 일과는 어떨까. “스님의 하루일과도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새벽 4시쯤 일어나 예불을 드리죠. 그 후 아침을 먹고 차를 마셔요. 그리고 산책도 하고…. 요즘은 ‘소통의 시간’을 가져요. 부탁받은 기고문을 작성하고 SNS에 글도 쓰죠. 그리곤 제가 속해있는 단체채팅방마다 그 글을 공유해요. 멀리 지방에 사는 신도들의 부탁으로 시작한 작은 일이 이젠 매일 6000명 이상과 소통하는 큰일이 됐죠. 세상이 변하는데 스님도 시대에 맞춰서 포교활동을 해야죠.(웃음)”
 
 
 
 
 
 
 
 
 
 
 
 
 
 
 
 
 
 
 
 
 
 
 
 
 
 
 
 
 
 
 
 
 
 
 
 
 
 
 
 
 
  불자의 소망은 단 한 가지
  깊은 깨달음으로
  선을 실천하는 것

  유쾌한 ‘괴짜 스님’의
  저잣거리 포교 생활
 
  -글 중에서도 시를 즐겨 쓰신다고.
  “네.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 그중에서도 시를 좋아하죠. 산책을 하면서 시상을 떠올리곤 해요. 그때그때 아름다운 것들을 시의 소재로 삼는 편이예요.”
 
  -시집을 발간하는 건 어떤가.
  “기회가 닿으면 하겠죠.(웃음) 시집은 아니지만 제가 지은 글로 노래를 만들기도 했었어요. ‘어떤 인연’라는 노래인데요. 불교의 인연사상을 담아 멋진 우리말로 써 내려 간 가사예요. 이거 말고도 국악인 박애리씨에게 노래를 선물하기도 했었죠.”
 
  -언제부터 불교에 관심을 가졌나.
  “고등학교 때 통학하던 길목에 ‘청년 불교학생회’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어요. 그냥 호기심에 포스터를 들고 무작정 찾아갔죠. 그 날이 12월 7일이었는데 12월 8일이 싯다르타가 석가모니가 된 날이래요. 그래서 이를 기념하고자 밤샘 정진을 한다며 참여하라는 거 있죠. 무척이나 당황스러웠지만 새벽 예불에 참여했어요. 당시 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예불을 드리고 있었어요. 밤을 새우느라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그때부터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대학에 오면서 그 관심은 더욱 커졌죠.”

  -중앙대 불교학생회 회장이었다고.
  “원래 종교에 대한 관심이 많았었고 철학, 인류학 등 인문학에도 흥미가 있었어요. 그런데 집안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공대에 진학하게 됐죠. 그 당시에도 주변 어른들이 공대를 가야 취업을 할 수 있다고 얘기하셨거든요. 결국 제 적성과 맞지 않은 공학을 전공하면서 많이 힘들었어요. 그때 제가 의지할 수 있었던 곳은 불교학생회 동아리뿐 이였죠. 그렇게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다 보니까 회장직도 맡게되 나아가 서울불교학생회 지부장도 맡게 됐어요.(웃음)”

  -서울지부장이라니 바쁜 대학생활을 보냈겠다.
  “엄청 바빴죠. 하지만 그만큼 정말 재밌게 포교활동을 했었던 것 같아요. 제가 회장직을 맡았던 당시 중앙대는 기독교 동아리의 규모가 더 컸거든요. 아직도 그런가요?(웃음) 아무튼 새내기 동아리원을 더 많이 모집하기 위해 이른 2월부터 현수막과 포스터를 제작해 홍보활동을 하곤 했어요.”
 
  -대단한 열정이다.
  “그런가요. 그렇게 노력한 덕에 신입 동아리원이 100명 넘게 들어왔었어요. 불교학생회에서 행사를 진행하면 루이스홀이 가득 찰 정도였다니까요. 불교학생회 행사는 곧 흑석동 행사와 마찬가지였어요. 정말 어마어마했죠.(웃음) 그리운 추억들이네요.”

  -중앙대에 대한 애정이 깊다.
  “네. 대학에 와서 다양한 불교활동을 통해 종교에 대한 사랑이 더 커진 거죠. 특히나 불교학생회에서 만난 동아리 선배님이 제가 출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거든요. 원래부터 스님이 되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부모와 이별해야 한다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전 너무나도 가난한 집안의 외아들이었기에 그럴 수 없었죠. 그런데 때마침 동아리 선배가 태고종이란 종파를 소개해주면서 여기서는 가족과 이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태고종 총무원에서 일을 시작했고 그 후 자연스레 출가하게 됐죠.”

  -출가의 계기를 묻는 건 실례라고 하던데.
  “아니에요. 스님에게 출가한 이유를 묻는 게 왜 실례죠? 전 오히려 먼저 얘기를 해주는 편이랍니다. 출가하게 된 배경도 제가 살아온 인생의 중요한 페이지가 아닌가요.”

  법현스님은 종교 간의 대화를 중요시하는 ‘종교계 마당발 스님’이라고 불린다. “세상에는 김씨만 사는 게 아니고 이씨, 박씨도 있잖아요. 이웃끼리는 인사도 나누고 음식도 나눠 먹어야죠. 물론 꼭 그래야만 한다는 법은 없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제게 불교는 최고의 종교지만 기독교, 가톨릭 등 타 종교인들에게도 배울 점이 너무나도 많아요. 하나만 아는 사람은 사실 하나도 모른답니다. 이렇듯 자신의 종교만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 종교조차 제대로 알지 못할 뿐이에요.”
 
  -매년 크리스마스를 챙긴다고.
  “열린사원에 오는 길에도 교회 보셨나요? 그 교회 목사님과도 잘 지낸답니다. 이젠 거의 한 가족이라고 봐야죠.(웃음) 그렇기에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듯 예수님 오신 날에도 꼬박꼬박 법회를 열어요. 종교 간의 다툼이 발생하는 이유는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서로의 종교를 이해한다면 욕하고 싸우는 일도 없을 테죠. 아는 것만으로도 종교 간의 소통과 화합이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노력이 대단하다. 심지어 성공회대에서 강의까지 했다.
  “네. 작년에 성공회대에서 채플 수업을 진행했었어요. 성공회대에서 강의하고 가톨릭대에선 연구도 하고…. 모두 제게 너무나 좋은 기회였어요. 사실 저의 노력보단 타 종교임에도 받아주고 불러주는 그들이 더 대단한 거죠. 종교·종단이 달라도 지향하는 바는 같다고 생각해요. 불교용어 중에 미륵(彌勒)이라는 단어가 있어요. 인도 원어로는 메타, 팔레스타인어론 메시아라고 번역되죠. 미륵은 사랑을 의미해요. 예수님, 부처님 모두 사랑에 관해서 얘기하시고 있잖아요.”

  -그런가. 스님도 신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글법요집』을 만들었다던데.
  “그렇게 칭찬해주신다니 감사해요.(웃음) 불교를 알고자 불경을 외우면서도 대부분 신도들이 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더라고요. 불경을 읽는 과정이 수행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 신도들이 불경을 외우는 중간중간 언제 절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 되는 모습이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인도어가 아닌 우리의 언어로 된 법요집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죠.”

  -열린선원에선 누구나 쉽게 반야심경을 외울 수 있겠다.
  “그렇죠. 신도들이 쉽고 편하다며 좋아해요. 어려운 용어를 쉽게 해석하고 축약이 가능한 부분은 편집도 했답니다.(웃음)”
 
  불교방송, 대학 강의뿐만 아니라 생명인권포럼 등과 같은 사회활동까지도 잊지 않는 스님의 삶에 여유를 찾아보기 힘들다. “바빠도 사회의 평화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게 종교인의 삶이죠. 깨달은 것을 세상에 전하고 반영되도록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선 더 바삐 움직여야겠어요.(웃음)”

  -템플스테이를 처음 기획했다고.
  “네. 2001년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사무국장을 맡았던 당시 한림대 정무형 교수의 제안을 받아 템플스테이를 기획하게 됐죠.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있었거든요. 유럽, 남아메리카 등 기독교, 가톨릭교가 대부분인 외국인들에게 불교문화를 알리는 계기가 될 거라 생각했어요. 초기에는 템플스테이라는 이름이 아니었어요. 외국인 선수 한국 문화체험, 외국인 불교문화…. 좀 더 쉬운 이름이 없을까 고민하다 88올림픽 당시 유행했던 홈스테이가 생각났죠. 그래서 옳다구나 이거다! 하면서 템플스테이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요즘엔 도심 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이 템플스테이를 즐겨한다.
  “금방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좋은 방향으로 템플스테이가 계속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불자가 아닌 젊은이들에게 불교문화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된 거잖아요. 템플스테이를 통해 많은 이들이 불교라는 종교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열린선원에서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모든 스님들이 열반을 꿈꾸지 않을까요. 다시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는 것. 열린선원에서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딱 하나 윤회금지를 원해요. 우리 사찰에는 ‘윤회금지’라는 표지판도 있는 걸요.(웃음) 그러기 위해선 더 많이 깨닫고 베풀어야 하겠죠. 전 이 저잣거리에서 참선하고 부처가 되어야죠.”
 
  법현스님의 호는 무상(無相)이다. 무상은 불교의 근본 교리로서 차별·대립의 모습을 초월한 무차별의 상태를 의미한다. “제 호에 쓰인 상이라는 문자는 이미지, 개념을 뜻합니다. 결국 그러한 것들이 차별을 만든다고 생각해요. 이 세상 모든 것은 전체로 존재해야 합니다. 진리는 모든 상(相)을 떠나야만 진리를 깨닫게 되죠.”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대학 시절의 추억만으로도 인생을 기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좋아하는 학문, 활동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요. 어떤 것이든 성공의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닌 자신이 그 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중요해요. 그래서 조금은 여유를 가지면서 즐거운 대학 생활이 됐으면 좋겠어요. 많이 진부한가요?(웃음) 그냥 스님이 보내는 새학기 덕담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네요.”
 
 
  당신에게 중앙대란?
  “공대에 다니면서도 정치사상사, 철학의 이해, 해부학 등 타전공의 수업을 즐겨들었어요. 그 덕에 대학 시절에 제 가치관을 확립할 수 있었고 사고의 확장도 가능했던 것 같아요. 특히나 불교학생회에 애정이 커요. 동아리 활동을 하며 참 행복했거든요. 동기들과 석가탄신일 행사를 준비하고 불법공부를 하던 때가 그립네요. 이처럼 중앙대는 제게 참 많은 추억이 담겨 있는 곳이죠. 지금도 중앙대 구성원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축언을 종종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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