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를 사랑하는 당신께
중대신문의 두 가지 답과 다짐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나요. 문득 당신 생각이 나는 요즘입니다.

  2년 전, 잔뜩 긴장한 채로 당신을 만나러 편집국을 나섰습니다. 초짜 기자였거든요. 당신은 악의 없이 물었습니다. “왜 중대신문 기자를 하고 있니? 그냥 학교 다니지.”

  애석하게도 이 물음에 답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알고 있는 모든 단어 중에서도 가장 가슴 뜨거운 단어를 골라봤지만 어떻게 배치해야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냥 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을 다시 만났습니다. 아마 이번에 만난 당신은 제가 못마땅했나 봅니다. 당신은 문제가 발생한 부서의 담당자였고 저는 사건을 파악하러 온 기자였습니다.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때 당신은 말했죠. 이 문제가 공개되면 중앙대는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그리고 제게 반문했습니다. 너는 정녕 이 학교를 사랑하느냐고.

  그 후로도 계속 당신을 만났습니다. 당신은 기사를 삭제해달라고 요구하기도, 협박하기도 했죠. 이쯤 돼서 당신도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려고 합니다. 언론의 본질과 역사에 대한 아주 진부한 이야기죠.
 
  언론의 역사가 부조리한 탄압으로 얼룩져있는 이유를 아실 겁니다. 언론의 도구화는 곧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권력은 대단히 특별한 것이 될 수도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언론으로 하여금 자신의 의지와 상이한 판단을 내리게 하는 것. 가령, 개인의 목적을 위해 사건을 은폐하고 공공의 알 권리를 침해하는 것. 다시 말해 당신이 제게 부탁한 것입니다.

  언론이 표방하는 철학이 공공의 선을 위하지 않을 때, 그 스스로 존재가치를 부정하게 됩니다. 즉 자기 배반이죠. 대학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곳 지식의 상아탑에서 공론장 역할을 하는 대학언론의 언론 철학은 더더욱 견고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당신의 요구에 응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당신께 이제야 답합니다. 첫 번째, 지키고 싶은 더 큰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중대신문이 70년 동안 지켜온 아주 소중한 것이자 모든 대학언론이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것이 제가 중앙대를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당신의 사랑 방식과 제 사랑 방식이 다른 것은 유감입니다. 다만 무엇이 이타적인 사랑이고 무엇이 이기적인 사랑일지는 당신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이곳 대학에서만큼은 더 이상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을 가져봅니다.

  마지막으로 당신께 다짐합니다. 이번학기에도 중대신문은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대학보도부는 사안에 대한 독자의 이해도를 높이고자 뉴스 해설 꼭지인 ‘가이드라인’을 신설했습니다. 학술부는 지식의 전달을 넘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기획을 준비하겠습니다. 진정한 아카데미즘의 복원을 목표로요. 기획부는 불편함을 당연시하는 사회에 딴지를 걸어볼까 합니다. ‘정당히 거는 딴지로 사회에 색다른 시각을 제시하겠습니다.

  또한 깊숙이 다가가겠습니다. 여론부는 개성 있는 인터뷰이로 유의미한 경험과 진심을 전하겠습니다. 직접적인 소통의 창구는 뉴미디어팀이 담당할 예정입니다. 정확하고 신속한 뉴스를 전달하고 질 좋은 콘텐츠를 제공하겠습니다. 어느새 당신의 일상 속 깊숙이 자리 잡은 중대신문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여전히 중앙대를 사랑하고 있다면 중대신문과 계속 마주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든지요. 중대신문은 앞으로도 가치와 본질을 잊지 않고 담론의 장을 적극적으로 주도해 나갈 테니까요.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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