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모두를 위한 것이자 모두의 힘이 필요한 것
용서 위해 반복되는 수많은 갈등, 올바른 사회 위한 필수 과제
 
개인 간의 단순한 실수부터 정치 범죄에 이르기까지. 용서를 논의하는 범위는 수직적으로든 수평적으로든 매우 넓다. 그렇기에 용서는 가볍기도 무겁기도 하면서 수많은 조건과 딜레마를 남긴다. 강남순 교수(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의 『용서에 대하여』는 용서에 대한 다양한 인식을 짚으면서 독자를 심오한 고찰로 이끈다. 용서가 선사하는 인식의 긴장 속으로 들어가 보자.

  불완전한 인간을 위한 용서
  용서를 말하기에 앞서 저자는 분노를 먼저 화두에 올린다. 분노는 용서를 위해 제거해야 할 감정으로 여겨지곤 한다. 이에 저자는 분노가 제거된 다음에야 용서가 가능한 것인지 물음을 던진다. 과연 우리는 분노를 잊어야만 용서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애초에 그런 용서가 가능할까?

  저자는 분노를 본능적 분노, 성찰적 분노 그리고 파괴적 분노로 나눈다. 본능적 분노는 육체적 폭력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이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동물적인 반응인 것이다. 성찰적 분노는 본능적 분노와 달리 부당한 행위에 대한 성찰을 거친 다음에 나타나는 분노다.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에 대해 느끼는 분노가 이에 해당한다.성찰적 분노는 용서와 양립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러한 분노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부당한 피해를 입고도 분노를 느끼지 못한다면 피해자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없다. 두 종류의 분노는 개인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분노다. 

  그러나 본능적 분노나 성찰적 분노가 지나치게 커지면 파괴적 분노로 변질한다. 파괴적 분노는 용서와 양립할 수 없다. 행위보다는 행위자에 초점을 맞춰 가해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악마화하기 때문이다. 파괴적 분노는 분노를 복수의 형태로 전이한다.

  저자는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분노를 용서를 통해 대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그 이유를 인간의 불완전성에서 찾는다. 인간은 자의든 타의든 악행을 저지른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다양한 단점을 가진 인간을 용서로써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용서는 타인만이 아니라 피해자의 내면까지 파괴적 분노로부터 방어한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인삼각
  용서는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의 변화가 필요하다. 가해자에게 요구되는 변화는 반성이다. 가해자는 자신이 잘못한 사건에 책임을 지고 무엇을 잘못 했는지 분명하게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피해자에게 다시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개선의 의지를 보여야 한다. 

  용서는 피해자의 변화도 필요로 한다. 저자는 이 과정을 다섯 단계로 설명한다. 먼저 피해자는 파괴적 분노를 버려야 한다. 그 후엔 도덕적 빚을 탕감해야 한다. 도덕적 빚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부당한 행위를 하면서 진 빚이다. 이를 탕감한다는 것은 가해자에게 더 이상 그의 죄를 상기시키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에서 피해자는 가해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형성하면서 가해자와 적어도 중성적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네 번째로는 가해자에 대한 정죄적 판단을 말소해야한다. 가해자를 정죄하는 행위는 가해자를 불완전한 측면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죄인’으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피해자는 가해자에 대한 용서를 선언해야 한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피해자도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

  하지만 저자는 가해자가 변화해도 피해자가 항상 용서를 베풀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일축한다. 가해자의 변화만으로 피해자에게 용서할 의지가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용서는 모두를 위한 축배일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용서가 개인적 영역을 넘어 공적 영역으로까지 확대되면서 정치적 용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저자는 남아공의 ‘진실화해위원회’를 정치적 용서가 긍정적으로 실현된 사례로 평가한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남아공의 인종 분리 정책으로 자행된 반인권적 행위를 밝히고 용서를 통해 인종 간 화해와 통합을 이루는 데 목적을 둔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진실 규명을 용서와 화해의 전제로 삼고 7년간 무수한 청문회를 진행했다. 책임자들은 피해자 앞에서 잘못과 책임을 인정했다. 그 결과 남아공은 인종 분리 정책의 가슴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민주사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저자는 정치적 용서의 문제를 지적하기도 한다. 정치적 용서는 피해자의 ‘대리인’과 가해자 사이에서 이뤄진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드러난다. 남아공 인종 분리 정권이 살해한 사람의 아내는 진실위원회 청문회에서 ‘용서할 수 있는 정부는 없습니다. 정부는 나의 고통과 아픔을 알지 못합니다. 오직 나만이 용서를 할 수 있어요.’라고 말했다. 국가나 집단이 한 것은 법적인 사죄나 사면일 뿐이며 용서는 피해자의 몫이자 선택이다.

  또한 저자는 진실화해위원회와 같은 정치적 용서가 오용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종종 권력자들은 용서를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용서를 최고의 덕목이라 치켜세운다. 용서가 낭만화 된 사회는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한다. 용서하지 않는 피해자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탈바꿈되기도 한다.

  새로운 사회를 위해 가해자를 용서하라는 분위기는 용서의 왜곡이자 피해자에게 저지르는 이중 가해다. 진정한 용서는 정치적 수단이 아니라 진실 규명과 반성을 거쳐야 한다.

  딜레마에서 해답 찾기
  저자는 용서의 조건과 과정을 말하면서도 무조건적 용서에 주목한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용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는 다소 모순적이지만 우리의 인식이 나아가야 할 길을 비춘다.

  조건이 있는 용서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먼저 개인과 사회의 정상성을 회복하거나 치유와 같은 보상을 위해 행하는 용서는 무언가를 얻고자 베푸는 것에 불과하다. 대가를 위한 용서는 순수한 용서라고 볼 수 없다.

  윤리적 위계주의도 조건적 용서가 가진 한계다. 데리다는 ‘나는 너를 용서한다’는 말이 가진 한계를 지적했다. 여기서 피해자인 ‘나’는 용서를 베풀 때 용서라는 권력을 쥔 우월한 위치에 선다. 이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 이러한 우열이 발생하면 기존의 가해자·피해자 관계가 망각될 수 있다.
 
  하지만 무조건적 용서가 현실에서 실현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인간은 용서에 앞서 치밀한 계산을 반복한다. 게다가 법적 제도나 도덕적 판단 아래 무조건적인 용서는 행해지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건적 용서와 절대적 순수성을 띤 무조건적 용서 사이의 딜레마를 끊임없이 겪어야 한다. 용서의 불가능성과 가능성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계속할수록 용서에 대한 인식적 지평을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용서엔 정답이 없다. 그렇기에 용서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하는 것이 우리가 용서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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