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양 작업선 아래 수심 약 44m에 미수습자 9명과 세월호가 남아있다.

지난 2014년 11월 11일 정부는 미수습자 9명을 찾지 못한 채 수색 작업 종료를 발표했습 니다. 수색 작업이 종료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수습자 가족을 남겨둔 채 팽목항을 떠났죠. ‘미수습자 가족’은 끝내‘유가족’이 되지 못했습니다. 돌아오지 못한 9명은 실종자로 남을 뻔 했 지만 미수습자 가족의 끊임없는 요구로 세월호 인양이 결정됐습니다. 지난 13일 중대신문은 세월호 인양 작업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는 진도 앞바다에 다녀왔습니다. 동 거차도를 향하는 한림페리 11호에 몸을 싣고 먼발치에서나마 세월호 인양 작업 현장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날은 날씨가 맑고 해수면도 잔잔해 인양 작업을 할 수 있겠다고 짐작했지만 무슨 이유인지 인양 작업선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늦춰지고 있는 인양 작업에도...
  동거차도에서 돌아온 후 우리는 팽목항 한쪽에서 미수습자 가족을 만났습니다. 미수습자 가족으로부터 인양 작업의 어려움에 대해 들을 수 있었죠. 인양을 위해서는 날씨, 파도도 중요하지만 바닷속의 유속도 중요합니다. 이날은 날씨도 좋고 파도도 잔잔했지만 유속이 가장 빠른 대조기였기 때문에 인양 작업이 불가능했죠.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유속이 빠르다는 맹골수도. 이곳에서 작업하기 위해서는 유속이 가장 느려지는 소조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인양 작업을 하려면 한 달에 두 번밖에 없는 소조기에 날씨도 좋고 파도까지 잔잔해야 하니 미수습자 가족은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볼 뿐입니다. 허다윤 양 어머니 박은미 씨는“작년 순수한 인양 작업시간만 합치면 한 달이 채 안 돼요. 작업할 수 있는 소조 기에는 날씨가 안 좋기 일쑤였죠”라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인양 작업이 늦어진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미수습자 가족의 걱정 또한 커졌습니다. 허다윤 양 아버지 허흥환 씨는“사람들 이 정부를 향해 인양 과정이 더디다며 비판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해요. 인양하는 주체는 정부인데 언제든 정부가 인양을 안 한다고 하면 그만이거든요”라며 심정을 털어놨습니다.
 
  세월호 특별법에서 소외된 미수습자 가족
  국민의 힘으로 쟁취했다고 생각한 세월호 특별법. 그러나 법안에는 인양에 대한 책임소재가 명시돼 있지 않습니다. 미수습자들도 ‘희생자’라는 이름으로 묶여있기 때문에 미수습자 가족과 유가족의 상황 차이를 반영하지 못합니다. 결국 세월호를 인양하지 못하거나 9명의 미수습자를 찾지 못하더라도 그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박은미 씨는“세월호 특별법에는 인양에 대한 내용이 없어요. 국민이 서명한 특별법을 정부가 수용하긴 했지만 핵심은 빠져있었죠. 결국 최대 피해자는 미수습자 9명인 거예요”라며 법안의 문제점을 짚었습니다.

  현재 국회에서 발의한 10여 개의 세월호 특별법 개정안 중에는 국가 주도의 세월호 인양을 언급한 법안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양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명시하지 않아 사실상 인양을 중단하더라도 제재를 가하기 어렵습니다. 가족들의 임시 처소 옆에 걸린 현수막에는 지난 2014년 4월 16일 당시 터무니없는 정부의 대처 상황이 그대로 기록돼 있는데도 말이죠.
 
  미수습자 찾기보다 초점이 맞춰져 있는 진상규명
  현재 언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에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배가 인양되면 어떻게 진상규명을 할 것인지, 세월호를 자를지 보존할지, 4·16 세월호참사 특별 조사위원회를 다시 꾸릴지에 대한 논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죠.

  그러나 우리가 진상규명에만 관심을 쏟을수록 9명의 미수습자는 점점 더 잊혀 가고 있습니다. 미수습자 가족에게 미수습자를 찾는 것보다 진상규명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박은미 씨는“진상규명을 하지 말자는 게 아니에요. 순서가 지켜져야 한다는 거예요. 인양 후에 9명의 미수습자를 먼저 찾아야 하는 거고 그 이후에 진상규명을 해야 하는 거예요”라며 울화를 터뜨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미수습자 수습과 진상규명이 같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수습자 가족에게 팽목항은 기다림의 장소입니다. 조은화 양 어머니 이금희 씨는“팽목항에 분향소가 있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팽목항은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기에 앞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9명의 미수습자를 기다리는 곳이 돼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루에도 100여 명의 사람이 팽목항에 다녀갑니다. 그리고 분향소에 들러 억울한 죽음을 추모하죠. 반면 가족휴게소에 있는 미수습자 가족을 찾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남은 9명을 찾아야 한다는 울림을 듣지 못한 채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데만 관심을 두죠.

  어느새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000일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세월호의 기억은 점점 바래져 가고 많은 사람들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죠. 미수습자 가족은 긴 시간이 지나도록 2014년 4월 16일에 살고 있습니다.

  미수습자 가족은 말합니다.“이제는 4월 17,18일을 살아가고 싶어요.”
 
▲ 팽목항 기억의 등대로 향하는 길에는 자연대 학생회가 건 현수막이 있다.    
▲ 4월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에 다윤이 어머니 박은미(48)씨는“우리가 그때까지 있을지 모르겠네”라며 희망을 내비쳤다. 다윤이 아버지 허흥환(54)씨는 웃으셨지만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는 걷히지 않았다.  
 
▲ 가족휴게소에 설치된 조형물 뒤로 석양이 지고 있다.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