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겨울사이에 부는 문학 감성
  문예창작전공과 중대신문이 주최한 ‘제26회 의혈창작문학상’에서 총 2편의 시와 1편의 소설이 수상작으로 선정됐습니다. 의혈창작문학상은 1991년 서라벌예술대로부터 이어지는 문예창작전공의 전통과 중앙대의 의혈 정신을 계승하고자 시작됐죠. 또한 우수한 문인을 발굴해 문학의 미래를 이끌어나가는 데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깊은 역사를 지닌 문학상인 만큼 소설가 전아리, 제성욱 등 저명한 문인들을 배출해내기도 했습니다.

  이번 의혈창작문학상의 시 부문 예선은 김장근 교수(문예창작전공), 이수명 교수(문예창작전공), 조동범 강사(문예창작전공)가 심사해 3명의 학생이 통과했습니다. 통과된 작품은 이승하 교수(문예창작전공)의 본선 심사를 받았는데요. 시 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은 이승하 교수는 “요즘 학생들에게서 감동을 주고 울림을 주는 시를 찾기가 힘들다”며 “무조건 난해한 시를 흉내 내려는 것보다는 좋은 작품을 필사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소설 부문 예선은 김형수 교수(문예창작전공), 박형숙 강사(문예창작전공), 서성란 강사(문예창작전공)가 심사해 2명의 학생이 본심에 진출했는데요. 이후 방현석 교수(문예창작전공)가 당선작을 선정했습니다. 소설 부문의 심사위원장을 맡은 방현석 교수는 “이번 작품들은 주제와 장르가 굉장히 다양했다”고 말했습니다. 덧붙여 그는 “현실 세계에 가까이 밀착해 관찰하고 스스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강화됐으면 좋겠다”고 문인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조언을 건넸습니다.

 
 
일러스트: 황예나씨
  수수께끼 봄

  바싹 마른 줄기와
  굳은 흙덩이 째로 뽑혀 나뒹구는 뿌리,
  솎아 낸 누런 잎과 비닐을 두른 안개꽃,
  국화의 목이 떨어지고 화분이 조각조각 엎드려 우는 제단에
  매장 되어 있는 몸으로,
 
  그가 노끈으로 붙들어 맨 가지를 어루만지고
  태동으로 흔들리는 알뿌리를 쥐엄쥐엄 감싸쥐는 소리를 느낀다
 
  곧 일렁이는 몸의 그가 나의 잠에 침투하여,
  해님이 공기의 과육을 깨무는 내음이
  물씬한 공중으로 떠밀어 올릴 것이다
 
  오래도록 얼음이 깔고 앉아 있던 흙의 건반을
  녹음이 피어 번진 그의 탄탄한 두 허벅다리로
  밟고 튀어오르다 회전하며, 넘어지기도 하면서
  잿빛 저음을 몰아낸다
 
  비로소 나는 하나의 정원, 찢긴 살갗 틈으로 단단한 봉오리를 돋우는 정원
  그가 내게 향을 점안하는 태도란 감미롭다
 
  라일락 싹은 아릿한 향의 연보랏빛 불꽃을 피워 올리며
  향그러운 잉크로 쓰인 글씨와 문장을
  작은 파열음과 함께 흘려 보낸다
 
  기분 좋은 공기에 취해 벌어진 입술 새로
  제비꽃이 뚝,뚝 흘리는 남색 군침의 봉오리는
  별들의 그림자에 짓물러지고
 
  설탕 냄새에 신경이 고조된 개미들의 발이
  작약꽃의 살결에 부딪혀, 그 따가움에
  동그란 입술은 한 장씩 발갛게 일그러져
  달의 숨을 틀어막는다
 
 
  과일 트럭

  수박이 만 원
  싱싱하게 익어 쩍쩍 갈라집니다
 
  행상인이 수박 한 마리를 골라
  우리에게 꺼내 들어 보인다
 
  체리나무에서 도려 온 지 얼마 안 된 심장들이
  아직 펄떡거리며 담긴 바구니 사이에서,
  둥근 핵을 감싼 장밋빛 살들이
  검붉게 익어 무르게 된 달콤한 맛이랑
  약간 덜 자라 단단하고 새큼한 맛으로 두근거리고 있는 그 트럭에서
 
  미끄러져 도망칠 수도 없이 태양의 아이들을 가득 배고
  공처럼 팽팽하게 여물어 오른 그것은 암컷 뱀
  독니는 빠졌고, 이제 말랑한 금빛 곡선을 남기며 굼실거릴 수도 없어
  봉오리처럼 시푸르고 뭉툭한 머리는
  잘린 탯줄처럼 비틀어져 쪼그라들었다
 
  행상인이 단칼에 그 산기가 달한 초록색 뱃가죽을 잘랐다
  축축하고 비린내나는 피 투성이 과육 속에
  착상하여 들어 선 천진하고 까마득한 아가들
  우리를 맹랑하게도 노려보는 저 번뜩이는 검은자!
 
  빨갛게 익어서 쩍 갈라집니다
  달달한 수박이 만 원
 
 
  「수수께끼 봄」 자평: 버려진 것들에게 싹 틔우는 입맞춤
  깨진 화분은 한때 사람의 보살핌을 받았다. 노랗고 붉은 국화들은 두 달 전만 해도 부전나비의 날개 리듬을 더 가까이 들으려 목을 꼿꼿이 세웠었다. 구겨진 비닐 안의 흙 묻은 안개꽃은 언젠가 두근거리는 품에 안겨졌었고, 뽑혀 나간 뿌리는 그저께까지도 두께가 수백 가지나 되는 현으로 투명한 물줄기를 받아 싱긋한 녹색의 음을 공기에 띄워 보냈다.

  바싹 마른 줄기와/ 굳은 흙덩이 째로 뽑혀 나뒹구는 뿌리,/ 솎아 낸 누런 잎과 비닐을 두른 안개꽃,/ 국화의 목이 떨어지고 화분이 조각조각 엎드려 우는 제단에/ 매장 되어 있는 몸으로,

  계절이 지나자 깨지고, 꺾이고, 솎아내 버려지고, 말라 죽고 썩은 것들이 무더기로 이 제단에 바쳐졌다. 지난날 그들이 가졌던 다채로움을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들이 자신의 빛깔을 영원히 잃어 죽음에 다다르게 됐다고 생각한다.

  이런 곳에서 태어난 ‘나’는 이름도 없고 형체도 없다. 다만 수수께끼의 존재와 교접하기 위해 매장된 영적 매개체이자, 버려진 것들의 조각난 영혼이 서로 결합해 만들어진 자아일 뿐이다. 나는 수수께끼의 존재를 보거나 맡을 수도 없지만 본능적으로 그가 노끈으로 붙들어 맨 가지를 어루만지고 태동으로 흔들리는 알뿌리를 쥐엄쥐엄 감싸 쥐는 소리를 느낀다. 그리고 곧 그 일렁이는 감촉을 가진 수수께끼의 존재와 교접하기 시작한다.

  오래도록 얼음이 깔고 앉아 있던 흙의 건반을/ 녹음이 피어 번진 그의 탄탄한 두 허벅다리로/ 밟고 튀어오르다 회전하며, 넘어지기도 하면서/ 잿빛 저음을 몰아낸다

  그는 겨우내 무겁게 흙의 건반을 짓눌러 저음만을 연주하던 무채의 색상들을 쫓아내며 생동의 춤을 추고, 대지에는 따뜻한 녹색의 핏기가 돈다. 서로 몸이 닿은 두 사람의 뺨이 발그레해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묻혀있던 나는 그 수수께끼의 존재 때문에 태초의 감정과 접촉을 경험하며 새로운 나의 육체를 낳는다. 몸 여기저기에 수많은 씨앗과 다사로운 공기 속 물방울들이 기억하는 고운 색채 무리가 잠들어 있는 몸을. 그는 무명 무색이었던 나의 몸 곳곳에 숨어 있던 색채와 감각 신경을 일깨운다.     
     
  비로소 나는 하나의 정원, 찢긴 살갗 틈으로 단단한 봉오리를 돋우는 정원/ 그가 내게 향을 점안하는 태도란 감미롭다

  나는 봄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 모음의 가지를 딛고 자음의 봉오리를 피우며 일어선다. 그리하여 라일락은 봄이 내게 속삭인 밀어 가득한 연서를 벌에게 발신해 온 초원에 사랑의 말이 피어오르게 될 것이다. 개미는 꿀샘의 달콤한 향에 이끌려 작약의 개화를 한 장, 한 장 재촉할 것이다. 나는 결국 봄의 연인이며 버려진 것들의 제단은 봄의 시작점이 된 것이다.

  봄이란 단순히 계절의 시작만을, 여러 가지 사랑의 감정이 광기를 띠고 얽혀 대는 여름의 이전 계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봄은 죽음이 잉태하고 있는 생을 본다. 버려진 것들의 모습 너머 그들이 간직한 빛을 본다. 색채들이 물고기처럼 유영하는 세계인 봄은 그 세계에서 하늘하늘 날아오는 지느러미다. 무채색의 대지엔 미지의 수수께끼이며 낡고 죽은 것들이 잠시 잃어버린 본연의 빛깔을 들여다보는 천진한 투시자이자, 꺾이고 바랜 그들에게 입을 맞추어 싹을 틔우게 하는 연인이다.
 
 

 

시 부문 당선자 박선희 학생 interview: 오감으로 그려낸 세상으로의 초대 

  먹기 바빴던 과일, 발밑 아래 보이지 않는 풀꽃에도 그들만의 결이 있다. 자연을 사랑하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보드라운 숨결이다. 칼바람이 스며오는 12월의 어느 날 봄의 따스함을 전해 준 박선희 학생(충청대 시각디자인전공)의 얘기를 들어봤다.


  -지난해에도 투고하셨다고요. 올해 드디어 수상하게 된 점 축하드려요.
  “감사해요. 지난해 의혈창작문학상 심사평에 시는 보여주기 위해 쓰는 것임을 명심하라는 조언이 있었어요. 이를 보고 많이 고민했죠. 지난해에 쓴 시는 마치 손거울 같거든요. 오로지 글을 쓰는 제 모습만을 비춘 것이죠. 올해는 크고 투명한 유리창 같은 시를 사이에 두고 독자들과 소통하고자 노력했어요.”

  -두 편의 시 모두 자연에 대한 특별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어요.
  “집 주변의 산길을 산책하며 식물의 특징들을 관찰하는 걸 좋아해요. 시적 대상인 작약꽃의 꿀샘이 외부에 있는 거 아세요? 그래서 개미들이 주변에 모여들어요. 자연을 오래 지켜보다 보니 그들로부터 인간의 감정이 느껴졌어요. 해를 보는 꽃에서 애틋한 애정이 느껴지듯이요.”

  -‘과일 트럭’이라는 제목이 흥미로워요.
  “길에서 한 과일 트럭과 마주쳤어요. 과일의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색채와 형질이 인상 깊었죠. 원형의 과일들은 마치 꽃들의 숨 방울이 끓어오른 자국으로 보였어요. 이 모든 것이 담겨있던 과일 트럭은 마치 마법이나 요술 같은 프릭쇼(Freak show)의 행차라고 생각됐어요.”

  -특별히 좋아하는 문인이 있나요?
  “시인 실비아 플래스(Sylvia Plath)의 삶을 통해 글을 쓸 용기를 얻었죠. 주로 광기 어리고 여성주의적인 작품을 남겼어요. 하지만 30대 초반에 스스로 가스 오븐에 들어가 죽음을 선택해요. 짧은 생이지만 살아 있는 동안 정열적으로 창작에 매달렸던 그의 모습에 감명받았죠. 저도 그처럼 창작활동에 심혈을 기울이고 싶어요.”

  -두 편의 시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있다면.
  “바쁜 일상 속에서 현대인들은 사물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 것 같아요. 그들에게 사물의 이면에는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감각적으로 전하고 싶었어요. 수박이 뱀의 모습을 숨기고 있거나 까만 태양의 아이를 배고 있기도 하는 것들이죠.”

  -마지막으로 당선 소감을 듣고 싶어요.
  “문학도들로 이루어진 버섯밭에서 기이한 빛깔의 야생 버섯이 발을 내려 갓을 펼 수 있을까. 스스로를 의심했어요. 이번 문학상은 앞으로의 창작활동에 큰 용기가 됐죠. 새벽마다 뜨거운 파랑을 피워 준 나팔꽃 ‘오로르’와 불멸의 사랑을 가르쳐 준 희곡 속 주인공 ‘살로메’, 그리고 개미와 풀꽃에 다정히 말을 걸던 어린 ‘선희’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어요.”
 
 
 
  심사평: 상투적인 표현을 넘어 눈부신 감각의 세계로
  13명 투고 학생의 시작품 가운데 3명 학생의 것이 예심을 통과했습니다. 「카펫의 자국」 외 6편, 「잠시 그대가 떠나지 않기를」 외 7편, 「황홀한 사고」 외 5편의 시를 여러 번 읽어봤습니다. 세 번째 학생의 시「과일 트럭」과 「수수께끼 봄」을 당선작으로 결정했습니다.

  「카펫의 자국」 등은 단문 위주로 전개돼 속도감은 있지만 시 전체가 운문이 아닌 산문입니다. “개가 짖는다/ 옆집을 깨웠다// 옆집에는 개가 없다/ 개가 없다는 것과/ 개가 잠들었다는 점/ 그리고 나는 울먹인다”(「개새끼」), “동생은 피아노를 연습한다/ 말랑말랑한 건반을 더 납작하게 누른다/ 햇빛에 잘 녹을 수 있게/ 비처럼 울적할 수 있게/ 손가락을 단단하게 만든다”(「몽매간」)처럼 언어가 건조하여 거칠게 전개됩니다. 행과 연을 나눈다고 해서 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시적 발견·인식·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잠시 그대가 떠나지 않기를」 등은 주제가 비교적 선명히 들어오지만 낡은 어법과 심상이기에 요즘 시집을 폭넓게 읽었으면 합니다. “살을 에워싼 외투가/ 겨울 동산의 한기를 막지 못하자/ 나는 그날 헤어졌다// 얼어버린 앙금도/ 사소함인지 평범함인지도 모르게/ 그날의 추위 속에서 헤맸다”(「겨울」), “기차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삶은 계란 껍데기 가득한 검은 봉지/ 차표 한 장 쥔 채로”(「고향 가는 길」) 같은 구절은 낯익은 세계에 머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띄어쓰기 오류도 지적합니다.

  「과일 트럭」은 매우 감각적인 시입니다. 트럭에 수박을 싣고 다니며 파는 행상이 칼로 쩍 잘라 이렇게 잘 익었다고 보여줍니다. 꽃뱀의 화려한 빛깔에 빗댄 시각적인 이미지가 눈부십니다. 「수수께끼 봄」의 소재와 주제는 흔한 ‘봄노래’인데 표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표현이 매우 감각적이며 역동적입니다. 변화무쌍한 자연의 색깔과 소리에 대한 묘사가 신선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시는 이렇듯 눈부신 상상력을 보여주거나 놀라운 비유를 보여줘야 합니다. 시는 설명이 아닌 묘사여야 한다는 고전적인 가르침을 상기시키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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