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가치’나 ‘인문학적 상상력’과 같은 표현들은 계량적 방식으로 지식을 확보하는 분야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어색한 수사(修辭)일 수 있다. 물론 인문학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이런 표현 때문에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을 한갓진 ‘유희()학문’으로 간주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철학이 제시하고 인간이 지향하는 삶의 가치가 있고, 문학이 주는 상상적 즐거움이 있으며, 역사가 주는 삶의 교훈이 있다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다.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아마 과학으로 존재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삶과 그 객관화 사이의 괴리’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인문학이 가진 은유적 힘과 환기적 작용에 근거하여 인문학이 삶을 인도하는 ‘방향설정의 학문’이자 근대화가 낳은 상처를 치유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주장도 있다. 
 
  인문학 중 특히 철학에게 종종 제기되는 비판 중의 하나는 그들의 주장이 너무 이상적이고 사변적이며 난해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 모두가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성격의 철학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이해하게 되면 이 비판은 다소 완화될 수 있다. 소위 이러한 철학의 부정적인 특성들은 각각 ‘현실의 문제’, ‘인간 경험의 한계’ 그리고 ‘인간 사유의 한계’와 연관이 있다. 
 
  먼저,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이상 국가·사회에 대한 주장들은 인간 사회에 만연해 있는 인간소외와 질곡의 사슬이 점진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으로 도저히 극복될 수 없다는 판단에서 비롯됐다. 그래서 그들의 구상은 뼈저린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현실감각이 떨어진 몽상가의 주장처럼 들린다. 
 
  둘째, 인간과 세계에 대한 매우 사변적인 주장들은 인간을 외부로부터 주어진 ‘소여(所與)의 희생물’이 아니라 인간 주체의 자율적 가능성을 함양하려는 치열한 반성에서 등장한다. 이것은 동물성으로 추락할 수도 있는 인간의 위상을 인간 정신의 가능성을 발판으로 고양하려는 의지의 발로이다. 그래서 카시러(E. Cassirer)에 따르면 모든 위대한 윤리적 철학자들은 “한계를 넓히고 초월하지 않고는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다.” 
 
  셋째, 철학이 제시하는 아주 난해한 주장들은 이것들이 일상적 이해와 기존의 지평을 넘어서서 새로운 세계를 제시해보려는 노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사고에 익숙한 혹은 ‘구체성의 사고’에 매몰된 사람들에게는 예컨대 선(先)이해, 선논리적, 선학문적 차원을 다루려는 해석학과 삶의 철학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때로 어려움은 관심의 부재를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철학이 이런 소통의 문제를 단순히 독자의 식견 탓으로 돌릴 수 없다. 로티(R. Rorty)는 철학의 전통적인 매체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는 논문과 같은 형식의 글이 철학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통로가 더 이상 아니며 소설이나 영화, 심지어 만화와 같은 대중매체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잘 알려진 철학의 형식이며, 이미 프랑스 계몽주의에서는 소설 형식의 철학적 저술이 유행했다. 철학적 에세이의 정수를 보여주는 니체는 헤겔이 시도하는 ‘체계적 서술’을 ‘정신병’이라고 혹평했다. 베를린 대학에서 정통(正統)을 자처하는 철학교수들로부터 음악에 관한 자신의 학위논문이 거절당한 쓰라린 경험을 겪은 짐멜(G. Simmel)은 동종교배(同種交配)로 불임(不姙)의 학문적 활동만을 일삼는 ‘학자카스트의 음모’에 대해 언급한다. 인문학 분야에서는 훌륭한 논문을 통해 학문적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것도 분명하지만 대학 내의 업적평가와 재임용이라는 틀을 벗어나면 논문만이 인문학의 중심적 활동의 결과로 간주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철학도 세상으로 나아가 적극적으로 삶의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듀이(J. Dewey)의 비유처럼 “지지기반도 없이 떠 있는 산봉우리란 없다.” 그에 따르면 철학, 과학, 예술, 종교 등과 같은 모든 인간 정신의 산물은 삶 속에서 형성된 총체적 경험의 산물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것들이 삶으로부터 분리되어 마치 “천상의 사물”처럼 ‘초월적 지위’를 구가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삶 위에서 삶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봉사하는 철학이 오늘날 절실히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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