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은 인간의 육체가 부피를 점유하는 그 무엇, 또는 인간을 주체로 만들어 주는 장소의 질서이다. 이 때 영화와 문학은 공간에 대한 상징적 기호로써의 지도를 그린다. 서울은 특히 우리에게 근대성의 한 징표로 의미화된다. 영상과 문자로 공간을 기록하는 것은 그 공간을 역사화하는 것이며, 인간의 시선 안에 포착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영화 <맨발의 청춘(1964)>)은 미국 헐리우드풍으로 도색된 가상 공간 서울을 그려낸다. 명동의 깡패이자 밀수꾼인 서두수(신성일)는 서울의 뒷골목, 명동의 환락가, 당구장, 다방, 싸구려 홀 등을 전전한다. 이때 프레임을 채우는 것은 느린 블루스와 빠른 트위스트 음률, 미국 영화배우의 포스터, 말론 부란도식의 타이트한 청바지, 권투잡지 링(Ring) 등이다. 대사의 딸인 요한나(엄앵란)는 파티, 음악회, 클래식 음악, 프랑스어, 이브닝 드레스, 스키 등의 유럽 스타일의 풍경으로 화면을 메운다. 그러나 이 영화의 ‘필름 누아르’적인 화면 구성에는 서울의 맨얼굴이 삭제되어 있다. 이보다 좀 일찍 나온 <자유부인(1956)>의 양품점과 댄스홀, <마부(1961)>의 화물차, 트럭, 버스, 자전거, 시발택시 등이 오히려 서울적이다. <맨발의 청춘>에는 당시 대중들의 60년대식 욕망, 황폐한 후진국으로부터 탈출해 옮겨가고 싶은 이상향만이 ‘시뮬라크라(모조)’로 그려져 있다.

<맨발의 청춘>이 놓쳐 버린, 또는 외면해 버린 서울은 어떤 곳인가. 서정적이지만 다소 시니컬한 김승옥에게 있어 서울은, “전봇대에 붙은 약 광고판 속에서는 이쁜 여자가 ‘춥지만 할 수 있느냐’는 듯한 쓸쓸한 미소를 띠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어떤 빌딩의 옥상에서는 소주 광고의 네온사인이 열심히 명멸하고 있었고, 이젠 완전히 얼어붙은 길 위에는 거지가 돌덩이처럼 여기저기 엎드려 있었고, 그 돌덩이 앞을 사람들은 힘껏 움크리고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던 공간일 뿐이다.(<서울 1964년 겨울(1965)> 겨울 바람이 부는 겨울, 서울의 포장마차에서 만난 나, 대학원생,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아먹은 서적 외판원은 서로의 경험을 공유할 수 없으며, 허무한 독백체의 대화를 흘려버리는 존재들이다.

또는 서울은 박태순에게 있어 “군인들이 거리마다 도열해 서 있었으며, 곳곳에 바리케이트가 쳐 있었고, 불타 버린 건물들, 탄흔이 남아 있는 포도에서 마치 전쟁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기라도 한 듯한 느낌”(<무너진 극장(1968)>을 주는 공간으로 비친다. 이때 서울은 혁명의 열기와 그 좌절의 탄식이 얽혀있는 심란한 공간이기도 하다. 모름지기 60년대의 서울이란, 혁명의 짧은 꿈이 끝나고 서슬 퍼런 근대화의 행군에 숨차하던 강파른 장소였다.

30년 후, 서울은 <초록 물고기>에 와서 상상적 배경화가 아닌, 인간을 규정하는 거대한 주체로서 얼굴을 내민다. 일산 신도시의 개발지역과 욕망의 집결지인 영등포는 주인공에게 있어 아주 매력적인 지뢰밭이다. 영등포의 중간 보스 배태곤(문성근)은 가진 것 없이 기회의 땅으로 기어 들어온 60년대적 욕망의 재생산이다. <상계동 올림픽>, <햇빛 자르는 아이>, <악어>, <세 친구>, <나쁜 영화> 등에서 서울은 철거민, 골방 속에 유폐된 하층민의 딸, 한강 다리 밑의 인간 쓰레기, 근대적 폭력에 노출된 청년, 지하도 바닥에 몸을 맡긴 홈리스족으로 우글거린다. <맨발의 청춘>과 <서울 1964년 겨울>은 우리로 하여금 서울의 ‘민속지학(民俗誌學)’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근대성의 공간에 대한 우리의 성찰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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