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를 청에 봄 춘, 청춘(靑春). 듣기만 해도 활기차고 힘이 넘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청춘은 푸르지도, 봄 같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손에 잡히는 것 하나 없이 불안하고 막막한 날들의 연속일 뿐이죠. 당신의 오늘도 그런 모습일지 모르겠습니다.

  이번학기 기자는 ‘청바지(청춘은 바로 지금)’라는 코너를 기획했습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이죠. 기자는 인터뷰이들에게 “당신의 청춘다움을 인터뷰하고 싶습니다”라며 여기저기 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화를 받은 학생들은 대부분 “제가 청춘이라고요? 전 남들과 다르지 않은데…”라며 멈칫하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자신이 ‘청춘’이라 불리기엔 부족하다면서요. 문득, 기자가 학생들을 ‘청춘’이라고 부르는 것이 ‘당신 열심히, 그리고 바쁘게 살고 있어요?’라는 압박으로 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청춘=열심히 잘 사는 사람’이라고 암묵적으로 정해져 버린 프레임 앞에서 기자와 인터뷰이 둘 다 멈칫하게 된 거죠. 언제부터 청춘이라는 말이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는 단어가 되어버린 걸까요.

  하지만 본인이 청춘으로서 부족하다는 학생들의 걱정은 기우였습니다. 스무 명의 인터뷰이를 ‘청춘’이라 부르자 놀랍게도 스무 가지 색상의 각기 다른 ‘청춘다움’을 마음껏 보여주었기 때문이죠. 기자는 누군가를 청춘이라고 부르는 것을 더는 머뭇거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 中

  김춘수 시인의 「꽃」에서는 그의 ‘이름’을 불러주자 ‘꽃’이 되어 다가왔다고 말합니다. 얼마 전까지 기자에게 이 구절은 그저 멋진 시구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스무 명의 인터뷰를 마친 지금은 어느 때보다 이 구절에 가슴 깊이 공감합니다. ‘청춘’이라 불러주자 ‘청춘’으로 다가온 사람들을 스무 명이나 봤기 때문이죠.

  청바지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은 항상 ‘당신에게 청춘은 무엇인가요?’였습니다. 스무 개의 청바지 기사 중 겹치는 답변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기자는 이제 ‘청춘다움’에 대해 고민하지 않습니다. 어떤 말로도 청춘을 정의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형형색색의 청춘을 한 가지 색으로 꼽는 건 불가능합니다.

  막막해도 괜찮습니다. 당장 손 위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더라도 당신이 청춘이라는 사실엔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으니까요. 세상이 강요하는 ‘푸르른’ 청춘의 모습은 당신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안해하지 않길 바랍니다. 우리는 제각기 전혀 다른 모습의 청춘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니까요.

  이제 전 제가 만났던 20명뿐만 아니라 지금 이 글을 사이에 두고 저와 마주하고 있는 당신도 청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21번째 청춘에게 마이크를 넘깁니다. 거기 청춘! 기자는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해졌습니다. 당신은 어떤 모습의 청춘인가요? 제게 어떤 꽃으로 다가와 줄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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