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문체와 냉철한 사회 진단으로 현대 철학의 중심에 서 있는 슬라보예 지젝. 그는 철학자이면서 지난 1990년에 치러진 슬로베니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는 이색적인 경력을 갖고 있기도 한데요. 그는 헤겔을 통해 라캉을 읽고 다시 라캉을 통해 마르크스를 읽을 것을 주장합니다. 이번주 ‘학술이 술술술’에서는 지젝이 말하는 헤겔과 라캉의 ‘사이’를 알아보기 위해 연세대에서 열린 철학 강연을 찾아가 봤습니다. 함께 볼까요. 

결핍 없는 타자는 존재하지 않아
다른 세계를 창조해야


지난 22일 연세대 과학원 S118B에서 민승기 객원교수(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의 강연이 진행됐다. 강연의 주제는 ‘슬라보예 지젝-라캉과 헤겔 사이’다. 민승기 교수는 지젝의 사상을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 독일의 철학자인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임마누엘 칸트와의 비교를 통해 설명했다.

  상상계와 상징계의 사이
  민승기 교수는 지젝의 철학은 라캉과 헤겔의 철학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고 설명했다. “지젝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라캉과 헤겔의 ‘사이’를 추구하는 거예요. 따라서 지젝을 알기 위해서는 라캉과 헤겔을 알아야 해요.”

  지젝은 라캉과 헤겔의 사이를 공간적 사이와 시간적 사이로 나눠 설명했다. 먼저 지젝의 공간적 사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캉이 연구한 정신분석학의 세가지 기본 범주를 살펴봐야 한다. 바로 상징계, 상상계, 실재다. 상징계는 언어와 언어의 상징체계로 여겨지는 문화 영역이다. 상상계는 실재와 구분되는 개념으로 인간은 상상계에서 자아를 형성한다. 지젝에 따르면 실재는 상징계와 상상계의 ‘사이’다.

  거울 단계는 상상계에 속한 대표적인 이미지며, 타자의 눈에 비친 자신이다. 따라서 거울 단계에 자신을 동일화하는 인간은 공격적이고 불안하다. 자신이 아닌 타자가 보는 시선에 따라 자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캉은 인간이 불완전한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이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젝 이전에 라캉의 상상계와 상징계는 대립 구도로 다뤄졌지만 지젝은 상상계와 상징계의 사이에 주목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학자는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을 분석할 때 포크너 소설의 등장인물이 상상계에 붙잡힌 채 상징계로 진입하지 못했다고 해석하는 데 그쳤어요. 하지만 라캉은 상상계와 상징계의 사이인 실재에 집중했죠.”
 
  사이의 공간성
  민승기 교수는 이어서 기표와 주체의 개념을 통해 사이의 공간성을 설명했다. 죽은 줄 알았던 시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나는 죽었다’고 말한 뒤 쓰러진다. 여기서 ‘나는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발화 내용, 즉 기표다. 반면에 ‘나는 죽었다’고 말하는 ‘나’는 발화 행위의 주체다. 그런데 ‘나는 죽었다’고 말하는 ‘주체’는 살아 있다. 기표는 분명히 죽음을 말하고 있지만 ‘나는 죽었다’고 말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살아있는 모순적 상황인 것이다.
 
  여기서 죽었다고 말하는 ‘나’와 살아있는 ‘나’의 분열로 ‘나’는 내용이 없는 빈 공간이 된다. 발화 행위의 주체와 발화 내용인 기표가 겹쳐 교집합으로 빈 공간인 ‘사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기표가 설명할 수 없는 빈 공간은 ‘소타자(Object a)’다.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기표에 포함돼도 내용상 차이가 발생하지 않는다.
 
  라캉이 설정한 개념인 ‘대타자’는 결핍이 없는 타자를 말한다. 그러나 라캉은 결핍이 없는 타자는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민승기 교수는 오히려 라캉이 대타자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주체에서 결핍을 찾는 자세를 비판했다고 말했다. “대타자에게 자신을 동일시하는 방식으론 결핍을 메꿀 수 없어요. 라캉에 따르면 대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타자로부터 분리돼야 해요.”
 
  대타자에 종속되면 자기 자신을 도구화하게 된다. 민승기 교수는 조선 시대에 사형을 집행하던 망나니의 예를 통해 설명했다. “망나니는 사형을 집행하는 행위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요. 자신을 그저 사형집행의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라캉은 망나니처럼 자신을 도구화하는 도착적인 삶이 아닌 주체로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체는 결핍과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는 망나니가 죄의식을 느끼는 살인자가 아닌 무감각한 사형집행인을 택하는 것과 같다. 망나니가 타인을 죽이는 데 무감각해지는 것은 ‘판타지(Fantasy)’로의 도피라고 볼 수 있다. 판타지는 타자의 결핍을 대면하는 것을 연기하는 행위다. 이처럼 주체는 판타지를 통해서 자신 혹은 타자가 결핍돼 있다는 사실을 회피한다.
 
  민승기 교수는 판타지는 이중적이라고 설명했다. “판타지는 타자가 결핍돼 있다면 생겨나지 않아요. 판타지는 타자의 결핍을 메꾸기 위해 생겨나기 때문이죠. 따라서 주체는 판타지에 의존해요. 타자의 결핍을 막고 싶기 때문이죠.”
 
  민승기 교수는 타자의 결핍을 막기 위해 판타지에 의존한 주체는 이중결핍을 겪는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서로 관계에서 문제를 느꼈던 한 부부가 결핍을 메꾸기 위해 아이를 낳기로 한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도 부부 사이의 결핍은 메꿔지지 않는다. 부부간 문제의 본질적인 원인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로 인해 부부의 결핍이 해소될 것이라 예상한 것은 그들의 판타지다. 판타지를 추구한 부부는 아이로 타자의 결핍을 채우려 했으나 오히려 결핍을 드러내고 만다. 그러나 지젝은 인간이 필연적으로 판타지를 꿈꿀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판타지를 통해서 타자의 결핍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미 항상’과 ‘아직 아닌’의 사이
  민승기 교수는 사이의 시간성에는 ‘이미 항상’과 ‘아직 아닌’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헤겔은 ‘이미 항상’과 ‘아직 아닌’이 겹쳐있다고 말했어요. 이 둘이 겹쳐있다는 사실을 가장 잘 나타내는 예가 바로 메시아죠.” 성경 속 백성들에게 메시아는 ‘아직 오지 않은 존재’였다. 하지만 아직 오지 않았던 것으로 보였던 메시아는 약자의 형태로 그들 곁에 ‘이미 항상’ 와있었다. ‘이미 항상’과 ‘아직 아님’이 동시에 발생한 것이다.
 
  민승기 교수는 프란츠 카프카의 『법 앞에서』를 통해 ‘이미 항상’과 ‘아직 아님’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법 앞에서』에서는 법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와 시골뜨기가 등장한다. 시골뜨기가 법의 문안에 들어가려 하자 문지기는 ‘지금은 안돼’라고 말한다. 시골뜨기는 문지기의 말에 긴 시간을 기다리지만 결국 법의 문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문지기는 ‘이 문은 너만을 위한 문이었어’라고 말하며 문을 닫는다.
 
  민승기 교수는 법의 문에서 ‘이미 항상’과 ‘아직 아님’이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시골뜨기는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법의 문안에 들어 있었어요. 이미 항상 안에 있었는데 시골뜨기는 아직 문에 들어가 있지 않은 형태를 띠었죠.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항상 우리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요.”
 
  라캉에 따르면 대타자를 찾으려는 것, 즉 ‘아직 오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항상’ 우리 속의 틈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숨기는 것이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미 우리 옆의 틈에 발생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봐야 해요. 나 자신도 틈이고 세계도 틈이고 그 틈과 틈의 만남 속에서 어떤 것들이 만들어질지 고민해야 하죠. 주체는 세계에 적응하는 것을 목표로 삶을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를 창조해야 해요”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