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에 신경 쓰지 않아도 내가 사는 데 문제는 없잖아?” 대화를 나누던 중 남자인 친구가 한 말에 기자는 한동안 입을 떼지 못했습니다. 페미니즘은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것일 뿐이란 편견에 빠져있던 과거의 기자와 그 친구가 너무나도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기자가 그 편견에서 빠져나올 수 있던 결정적인 이유는 제1880호 ‘빠순이’에 대한 기획 기사 덕분이었습니다.
 
  기자는 여성 팬이 빠순이라 멸시받은 이유는 그들이 여성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전부터 의심했었습니다. 취재하면서 의심은 확신이 됐죠. 가부장적인 사회는 젊은 여성들을 통제하고자 했습니다. 스타에게 열광하는 여성은 과거의 수동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났기에 빠순이라 낙인 찍혔죠. 팬 활동 또한 빠순이라 치부되는 여성들이 하기에 ‘팬질’이라 비하됐습니다.
 
  취재하면서 가장 놀라웠던 건 성차별적 시각으로 인해 피해를 받은 것은 여성만이 아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가부장적 규범 하에서 남성은 여성보다 권위를 가져야 했기에 사회적으로 사적 영역에서도 위엄을 갖출 것이 요구됐습니다. 남성은 문화를 향유하고픈 욕구를 스스로 억압할 수밖에 없었죠. 남성들은 ‘여성의 전유물인 팬질’을 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취재 후 기자는 이러한 현상이 과연 문화의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것일지 고민해봤습니다. 남성성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사회에선 여성이 배제당하는 것은 물론, 남성 또한 남자다움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남성을 가두는 남자다움, 흔히 ‘맨박스’라 불리는 이것은 사회 도처에 너무나도 만연해 있었습니다. ‘남자는 울면 안 된다, 힘든 일은 남자가 해야 한다, 결혼할 때 남자가 집을 사야 한다’ 등의 통념들이 모두 맨박스에 해당하죠.
 
  자칫 맨박스는 여성차별에 대응되는 남성차별로 보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맨박스는 여성적이라 불리는 것에 대한 멸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앞서 제시한 예시만 해도 남성은 여성보다 강인해야 하고, 능력이 좋아야 하며, 돈을 잘 벌어야 한다는 전제가 포함돼 있죠.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에 있기에 더 많은 부담을 져야 한다는 논리인 것입니다. 남성들에게 ‘계집애 같다’는 말이 비난으로 작용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맨박스는 결국 여성차별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남성에게까지도 부담을 지워왔던 거죠.
 
  모두에게 피해를 주는 성차별은 타파돼야 합니다. 성 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은 성의 구분 없이 추구해야 하는 이데올로기죠. 페미니즘이 여성 위주로 진행되는 것 또한 여성을 우대해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여성차별을 없애는 것이 차별타파의 시작이기 때문이었죠. 남성 이외의 성이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서면 맨박스는 자연스레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자는 친구에게 입을 열었습니다. “이건 네게도 중요한 문제야.” 페미니즘은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사람이 성에 의해 규정되거나 차별받지 않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친구가 남자다움에 갇혀 팬조차 떳떳하게 될 수 없던 이들이 되지 않길 진심으로 바라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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