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북』을 읽고 독일 각지를 돌던 날이 있었다. 라이프치히 중앙역에 도착해서 오랜 지인을 만났을 때, 그가 한 우스갯소리에서 나는 독일인들의 역사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라이프치히 이 중앙역에서 웰컴 투 나칠랜드! 외치면 아마도 난리가 날 걸?”  
 
  신문에서 아베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죄 편지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한 발언 때문에 분노했던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독일과 일본의 역사 인식 문제는 늘 비교 대상이 되었다. 
 
  『양파 껍질을 벗기며』는 전후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행동하는 지성이라 불리는 귄터 그라스의 자서전이다.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39년부터 1959년까지 『양철북』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이십 년 동안의 과정을 조명하고 있다. 그러나 『양철북』의 탄생 배경이나 문학적 성취보다는 그라스가 열일곱 살에 히틀러의 나치 무장 친위대에 징집당해 복무했다는 사실에 이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민족의 양심’, ‘도덕의 심급’, ‘도덕의 사도’ 등의 별명으로 불리던 귄터 그라스에게 독일 사회는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에게 독일 사회가 기대했던 도덕의 기준은 남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예비평가 헬무트 카라제크는 그가 좀 더 일찍 친위대 복무 사실을 밝혔다면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 했을 것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다수의 독일 언론이 그의 뒤늦은 친위대 복무 사실에 비판을 가하는 데에만 초점을 두고 이 작품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귄터 그라스는 『양파 껍질을 벗기며』를 통해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그때, 나는 왜 몰랐던가? 왜 묻지 않았던가?” 그라스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자문함으로써 수치스러운 자신의 과거를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직시하고 있다. 
 
  “독일인이 그런 짓을 했다고요?”, “독일인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어요.”, “독일인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아요.”, “선전이야. 모든 게 선전일 뿐이야.” 미군 수용소에 수감된 독일군 포로들에게 나치의 잔학성을 보여주는 증거를 공개하자 그들이 하나같이 보인 행동이다. 그들은 강제 수용소를 지나면서도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너희 샤워기가 달린, 가스실이라고 소문난 샤워실 봤지? 방금 회칠을 했어. 틀림없어. 미군이 나중에 지은 거야…….” (252쪽) 
 
  양파 껍질을 벗길 때면 눈물이 흐르듯 그의 회상 과정 역시 고통스럽다. 너무 이른 나이에 전쟁의 한복판에 던져진 소년을 그려내는 작업은 귄터 그라스 자신의 삶과 작품의 역사 사이에 흐르는 그 시대 역사의 과오를 외면하지 않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 아니었을까.
 
  “배고픔이 그랬던 것처럼, 죄과와 그에 따르는 부끄러움 역시 우리를 갉아먹고, 끊임없이 갉아먹었다. 하지만 굶주림은 일시적이었고, 부끄러움은…….”(2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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