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학 교수가 라틴 아메리카의 팜파스 지역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지난 8일(현지시각)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으로 전 세계에 보수의 물살이 들이닥치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됐습니다. ‘좌파의 몰락’에 처해있는 라틴 아메리카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요. 라틴 아메리카의 좌파와 우파는 어떻게 구성됐을까요.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의 대표적인 국가인 아르헨티나는 어떤 정치 역사를 갖고 있을까요? 이번주 ‘학술이 술술술’에서는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를 주제로 고려대에서 열린 교양 강연을 찾아가 봤습니다. 함께 볼까요.
 
크리올로에 의한, 크리올로를 위한 독립
좌우로 반복된 아르헨티나의 역사        
 
지난 9일 고려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이재학 교수(고려대 서어서문학과)의 강연이 진행됐다. 강연의 주제는 ‘남미 우파와 좌파의 대립’이다. 이재학 교수는 19세기 이후 라틴 아메리카의 시대적 흐름과 함께 아르헨티나의 정치경제 상황에 대해 강연했다.
 
  그들만의 혁명
  19세기 식민지 지배하에 놓여있었던 국가들에게 불었던 독립의 바람은 브라질을 제외한 라틴 아메리카에도 불어왔다.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은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인디오와 일반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독립은 크리올(Criole)에 의해, 크리올을 위해 이뤄졌다. 크리올은 식민지 지역에서 태어난 유럽인의 자손으로 대지주로서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적 권력을 쥐고 있었다. 
 
  “크리올은 경제적 권력뿐만 아니라 정치적 권력 또한 얻기 위해 독립을 추구했어요. 독립 이후 그들은 더욱 강력한 기득권층으로 자리매김했죠.” 독립의 바람이 한바탕 불어 닥친 이후 라틴 아메리카에는 군부, 대지주, 가톨릭 교회의 거대한 권력의 트라이앵글이 형성됐다. 경제적인 부를 누리고 있는 크리올이 국회에서도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군부에까지 세력을 떨치게 됐다. 국교인 가톨릭은 크리올의 권력을 뒷받침하는 주된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이 권력의 트라이앵글은 20세기까지 이어졌다.
 
  혁명으로 찾아온 핑크빛 물결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또다시 혁명이 일어난다. 1980년대 전 세계에서 발생한 민주화운동이 라틴 아메리카까지 이어져 군부독재가 물러나고 민주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1990년대에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잦아들고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우파정권이 들어선다. 
 
  이재학 교수는 신자유주의로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는 발전했지만 그 이익의 재분배는 불평등하게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소득 불평등뿐만 아니라 인플레이션으로 국민의 반발이 심해졌고 국가부도라는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어요. 사람들은 더는 신자유주의를 원하지 않게 됐죠.”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에 대한 국민의 반발로 1990년대 말부터 라틴 아메리카의 각 나라에는 사회주의 성향의 좌파 정권이 들어서는데 이러한 현상을 ‘핑크 타이드(Pink Tide)’라고 이른다. 핑크 타이드로 2014년 11월까지 라틴 아메리카 12개국 가운데 파라과이와 콜롬비아를 제외한 10개국에서 온건한 사회주의 성향의 좌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2000년대 들어서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은 집권당의 성향과 관계없이 경제성장을 이뤄 칠레, 브라질, 콜롬비아 등의 라틴 아메리카 경제 GDP가 3~4배가량 성장했다. 이재학 교수는 라틴 아메리카 경제의 비약적 성장은 중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중국의 산업발달로 인해서 지하자원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했어요. 당연히 지하자원의 가격은 폭등했고 이로 인해 1차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는 국가가 다수인 라틴 아메리카는 경제적 호황을 맞았어요.”
 
  그러나 경제적 호황은 오래가지 못한다. 2008년 미국에서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여파로 세계 소비재 수요가 줄고 중국의 산업 역시 둔화된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원자재 수요는 줄어들었고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생산되는 구리, 니켈의 값이 폭락해 라틴 아메리카 국가 대부분이 경제적 위기를 맞았다. “2008년 이후 석유 산유국인 콜롬비아, 멕시코, 베네수엘라 또한 석유 값의 폭락을 겪었어요. 이러한 사태로 인해 라틴 아메리카는 좌에서 우로 또다시 정치적 노선의 변화가 일어났죠.”
 
  아르헨티나의 빛과 그림자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좌파와 우파가 시계추처럼 반복해서 집권했어요. 그중에서도 아르헨티나는 특별히 포퓰리즘 정권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국가였죠.” 이재학 교수는 2000년대 이후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적 상황 중에서도 아르헨티나를 중심으로 포퓰리즘이 성행하게 된 이유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아르헨티나는 독립 당시 80만 명의 적은 인구수에 비해 영토는 광활했다. 그리고 영토 대부분은 ‘팜파스(Pampas)’, 즉 초원이었다. 이재학 교수는 아르헨티나가 경제적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에는 팜파스가 있었다고 말했다. “아르헨티나 지역에는 금과 은도 발견되지 않았고 문명도 발달하지 않아 스페인 사람들이 정복을 포기했어요.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때 버린 소와 말은 팜파스에서 수천 마리에 이르는 수로 번성하죠.” 이후 아르헨티나는 냉동장치가 발달됨에 따라 소와 말의 가죽과 육류를 수출했고 이로 인해 많은 무역 이익을 얻는다. 
 
  이재학 교수는 독립 이후 자유당과 보수당으로 나뉘었던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설명했다. “자유당은 상인들의 입장을 대변해 중앙집권적 정부를 지지했던 반면 보수당은 팜파스 대지주의 입장을 대변해 느슨한 연방제를 지지했어요. 그러던 와중 독재자인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는 자유당과 보수당이 대립각을 세우는 틈을 노려 우파 독재 정권을 수립하는 데 성공하죠.”
 
  로사스는 커다랗고 강력한 하나의 아르헨티나를 유지하려 했다. 그는 특히 아르헨티나의 정체성이자 토착 문화의 상징인 가우초(Gaucho)를 내세웠다. 아르헨티나의 가우초는 수출용 소나 말의 가죽과 고기를 도매하는 일에 종사한 팜파스의 목동이다. 이재학 교수는 로사스가 가우초를 내세웠던 것은 독재 정권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로사스는 가우초를 중심으로 자신의 친위 부대를 창설했어요. 그는 친위 부대를 중심으로 자유당과 보수당을 탄압해 공포 정치를 펼쳤고 자유당과 보수당은 모두 로사스에게서 등을 돌렸죠.”
 
  이재학 교수는 로사스의 실각 이후 집권한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에 대해 설명했다. “사르미엔토는 아르헨티나를 철저히 문명화하는 데 집중했어요. 아르헨티나 역사상 처음으로 유럽의 대규모 이민을 받아들이죠.” 로사스가 아르헨티나 고유의 정체성을 내세웠던 반면 사르미엔토는 문명화를 통해 아르헨티나 고유의 것을 버리고 유럽의 것을 수용하기를 시도했다.
 
  사르미엔토의 정책인 대규모 이민으로 인해 유럽인 이민자가 급증하면서 이주민과 토착민들의 갈등이 심화된다. 로사스의 실각 이후 정권을 나눠 가진 자유당과 보수당은 그들의 정치적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배타적 이민정책을 추진한다. 그들은 이민자들이나 내륙의 원주민들, 인디오들이 권력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크리올의 트라이앵글은 아르헨티나에서 사라지지 않아 크리올을 제외한 민족들은 정치에서 철저히 배제된 것이다.
 
  1929년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아르헨티나 수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육류 수출이 급감했고 그에 따라 아르헨티나 경제는 급속도로 추락했다. 아르헨티나의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는 동안 정치적 혼란으로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다. “후안 도밍고 페론은 아르헨티나가 경제적·정치적으로 혼란을 겪고 있을 때 등장했어요. 그가 펼쳤던 정책은 페론주의라고 일컬어지죠.” 
 
  페론은 아르한테나 국가 예산의 67% 이상을 복지 정책을 실현하는 데 투입했다. 특히 페론은 시민들의 복지를 명목으로 우유 값을 낮췄다. 낮은 가격으로 우유를 팔아야 하는 생산자들은 수지타산을 맞출 수 없어 생산을 멈추는 결과가 나타났다. 생산활동이 정지되자 우유의 가격은 폭등하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또한 페론 정부는 내수 위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했다. 기업에 수출세를 부과해 수출을 제한한 것이다. 그 결과 상품의 질이 하락해 시장 경쟁력이 약화됐다. 이재학 교수는 아르헨티나의 과도한 포퓰리즘 정책은 경제적 쇠퇴를 불러왔고 지금까지 그 폐해가 남아 있다고 설명하며 강연을 끝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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