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생태학』의 저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딸은 아버지의 책을 두고 “이 책은 지적 여정의 기록이다”고 말했다. 베이트슨은 생태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는 살아생전 종종 “전공이 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관여한 학문이 생태학뿐만 아니라 인공 두뇌학, 유전학, 정신의학, 동물학, 병리학 등으로 다양했기 때문이다. 『마음의 생태학』은 그의 딸이 말했듯이 그의 긴 학문적 여정이 녹아 있다. 이번주 강의실 밖 산책에서는 서명수 교수(프랑스어문학전공)와 함께 베이트슨의 기나긴 여정을 들여다봤다.
 
 
 
              서교수가 베이트슨의 ‘이중제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김정준 기자
 
 
생태학, 인간과 ‘나’가 중심인 사회에
경종을 울리다
 
『마음의 생태학』은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35년간 저술한 여러 주제의 논문들을 재구성한 것이다. ‘메타로그’라고 하는 대화 형태의 글부터 강의 내용, 논문까지 글의 형식이 고정돼있지 않다. 내용 또한 정신분석학, 생물학, 인공 두뇌학 등의 다양한 학문을 품고 있다. 그러나 서명수 교수는 『마음의 생태학』에 다양한 학문이 담겨 있어도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분명하다고 말한다. 베이트슨의 수많은 연구와 오랜 기간의 지적 탐험은 인간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이뤄졌다.
 
위대한 생태학자, 서구 사회를 비틀다
  베이트슨이 『마음의 생태학』을 집필한 데에는 서구의 근대적 사고와 문화를 비판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서명수 교수는 서양의 근대적 사고에는 인간이 주체이고 인간을 제외한 바깥의 것은 객체로 여기는 인식이 깔려있다고 설명했다. “베이트슨은 개인과 사회를 분리하고, 자연과 인간을 대립적으로 보는 것에도 문제의식을 느꼈고 무엇보다도 인간을 모든 세계에서의 주체로 인식하는 것을 문제시했어요.”
 
  서명수 교수는 서구의 근대적 사고로 인한 폐해들에 대해 언급했다. 대표적으로 제국주의 및 군국주의로 인한 식민지 지배, 1·2차 세계대전과 인종 말살 정책 등이 그것이다. “지금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정상적이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그때는 자행됐어요.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합리화했던 것은 서양의 근대적 이념이에요.”
 
생태학적 커뮤니케이션
 
인간 문명의 건강한 생태계는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지속적인 복잡계complex system를 만들기 위해 문명의 융통성이 환경의 융통성과 조화돼야 하는 고도의 문명과 환경이 결합된 단일 시스템이 심지어 기본적인 (하드-프로그램된) 특성의 완만한 변화를 위해서도 개방도 되어 있는 것. -『마음의 생태학』 741p 중
 
  베이트슨은 현대 문명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 즉 ‘병리적’이라고 생각했다. 베이트슨에 따르면 현대 문명의 모든 문제는 ‘나’를 제외한 타자를 주체가 아닌 단순한 객체로 인식할 때 발생한다고 봤다. 타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그릇된 이해와 커뮤니케이션을 낳는다. 그에게 타자는 ‘나’를 제외한 대상이 아닌 인간, 사회 등 우리 세계를 이루는 모든 개별 요소를 포함한다. 베이트슨은 『마음의 생태학』에서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생태학적 커뮤니케이션을 설명했다.
 
  서명수 교수는 베이트슨의 커뮤니케이션은 상호주관성을 전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커뮤니케이션은 서로를 주체로 인정하는 상호주관성에서 출발해요. 따라서 일방향적 전달은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볼 수 없죠.” 
 
  커뮤니케이션의 전제인 상호주관성은 다윈의 진화론과 대비해서 봤을 때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다윈의 진화론에서는 생존 단위를 가계, 종, 하부 등으로 나누고 ‘나’가 아닌 대상은 타자화한다. 그에 반해 베이트슨은 좀 더 넓은 의미로서의 단위를 생존 단위로 본다. ‘유기체 내의 유전자’, ‘환경 내의 유기체’, ‘생태계’가 대표적이다.
 
  또한 베이트슨은 자신이 속한 환경을 파괴하는 유기체는 그 자신 또한 파괴한다고 여긴다. “진화론적 관점에서는 어느 한 종이 우월하면 다른 종을 파괴하고 지배할 수 있다고 봐요. 그러나 생태학적 관점에서 이런 상황은 상위의 종에게도 유익하지 못해요. 모든 것은 상호작용이라는 관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에요.” 베이트슨에 따르면 ‘나’는 타인, 사회, 자연 등과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 존재하는 ‘유기체’다.
 
  그렇다면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은 무엇일까. 서명수 교수는 ‘상호이해’라는 개념으로 커뮤니케이션의 지향점을 설명했다. 서로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이유라는 것이다. “‘나’와 다른 세계는 ‘나’와 충돌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커뮤니케이션은 충돌을 포섭해나가는 과정이에요. ‘나’가 충돌하는 대상은 또 다른 인간일 수도 있고 자연일 수도 있고 사회일 수도 있어요.” 서명수 교수에 따르면 충돌 대상과의 협력관계를 구축해나가는 것이 생태학적 관점에서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중제약에 걸린 병적 사회
  베이트슨은 사회가 병리적이라는 것을 ‘이중제약(Double Bind)’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했다. 서명수 교수는 이중제약은 인간이 언어를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다. 베이트슨은 인간이 언어로 전하는 메시지에는 ‘내용’과 ‘관계’라는 두 차원이 있다고 봤다. 예를 들어 A가 B에게 ‘철수가 금주를 선언했다’고 전한다면 이 메시지의 내용은 말 그대로 ‘철수가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는다’다. 그러나 A는 철수의 친구이고 철수는 B를 짝사랑하는데 B는 술을 마시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상황에서 A가 한 말은 B로 하여금 철수에 대해 조금 더 좋게 생각해보라는 조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즉 A의 말은 ‘철수에 대한 B의 인식 개선’이라는 의도성이 있는데 이 의도성은 철수와 A, B 간의 ‘관계’ 속에서 해석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A와 B는 서로 조언을 주고받는 관계를 형성한다.
 
  이중제약은 베이트슨이 정신분열증 환자가 속한 가족의 왜곡된 의사소통 방식을 연구하면서 발견한 개념이다. “메시지의 두 차원으로 인해 커뮤니케이션이 왜곡될 수 있고 이로 인해 관계가 건강하지 않을 수 있어요. 베이트슨은 왜곡된 커뮤니케이션을 ‘이중제약(Double Bind)’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했죠.” 
 
  우선 이중제약은 어느 한쪽이 다른 쪽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할 정도로 상하 관계가 뚜렷한 관계를 전제한다. 이 관계 속에서, 상급자가 (1)동시에 두 개의 모순된 명령-상급자의 말은 곧 명령이기 때문에-을 내리고, (2)이 모순 명령에 대하여 하급자가 문제 제기를 하려 하자 상급자가 문제 제기를 금지하는 또 다른 명령을 내릴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아이를 원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낳게 된 엄마가 있다. 엄마와 아이의 관계는 상하 구별이 확실한 관계이다. 엄마는 아이를 사랑해야 한다고 느끼면서도 동시에 아이에게 적의와 불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느 때는 아이가 엄마에게 스스로 안기길 바라면서도 어느 때는 아이가 엄마에게 안기려 할 때 “저리 가서 놀아”라고 말한다.(모순 명령) 엄마의 모순적인 모습이 반복되면 아이는 엄마가 곁에 오라는 신호를 보낼 때마다 망설이게 되고 그런 아이에게 엄마는 “넌 날 사랑하지 않는구나”라는 차가운 반응(제 삼의 명령)을 던진다. 이때 아이는 엄마의 곁에 다가갈 수도 다가가지 않을 수도 없는 이중제약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이중제약적 상황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아이는 건강한 심리를 가진 어른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서명수 교수는 이중제약이 ‘상하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봤다. 이런 관계에서는 상급자의 도덕성과 윤리가 특히 요구되는데 그렇지 않을 때 의사소통이 쉽게 왜곡될 수 있고 그러면 병적인 증상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베이트슨이 말한 이중제약은 가정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중제약은 학교, 군대, 기업, 국가 등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있어요.”
 
  서명수 교수는 베이트슨이 협력을 통한 상호이해와 공존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개별적이고 분산된 존재가 아니라 상호 의존적 존재인 것을 간과한 채 커뮤니케이션을 하면 사회는 점점 병적인 공간으로 물들 수밖에 없어요. 서로 이해하고 협력해야 함을 기억해야 우리는 건강한 사회에서 공존하며 발전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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