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가 왜 호구로 불리냐고요? 당신 같은 기자들이 자꾸 ‘호구, 호구’하며 기사를 쓰니까 그렇죠!” 기자가 제1879호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언젠가는 마른다’ 기획기사 취재 중 한 교수님께 들은 말입니다. 기사의 취지를 불편하게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지 못한 기자에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심층기획부 정기자로서 사회적 소수자의 삶을 보여주고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기사를 써왔습니다. 그러나 교수님의 지적처럼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것 같았습니다. 기사에 ‘비연애자’, ‘호구’, ‘XX충’, ‘혐오’ 등 특정단어를 언급할수록 관련 당사자들의 상처가 더욱 부각되기도 하고 차별적 문화를 몰랐던 독자에게조차 차별적 인식을 심어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뉴스를 어떻게 틀 짓기 하느냐에 따라 독자의 생각이 바뀐다는 이론에 따르면 기자의 걱정은 타당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스스로에게 어떤 틀에 현실을 담아내고 싶었는지 되물었습니다. 길었던 고민과 달리 답은 쉽게 떠올랐습니다. 기자가 건네고 싶었던 가장 커다란 틀은 ‘불편함’이었습니다. 독자가 의식하지 못했던 차별에서 탈피해 현실을 불편하게 느끼길 바라는 마음이었죠.   
 
  불편함은 진보의 시작이 되는 감정입니다. 손이 불편해 주먹도끼를 만들고 발이 불편해 신발을 신었듯이 현대 문명의 발전은 불편함에서 비롯됐습니다. 사회 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틴 루터킹은 버스에서 체포된 흑인 여성을 보고 불편함을 느껴 버스 회사에 대한 보이콧을 시작했고, 방정환은 장유유서라는 명분으로 ‘애새끼’, ‘어린놈’이라 멸시당하는 아이를 보며 불편함을 느껴 ‘어린이’라는 단어를 만들었습니다. 변화는 불편에서 기인하는 것이죠. 
 
  그렇다고 변화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변화 자체를 불편으로 느끼기도 하기 때문이죠. 변화로 인해 현재의 익숙함이 위협받는 경우에 그렇습니다. 갓 대학에 입학해 연애지상주의에 휩싸여 있던 기자에게 비연애담론이 이상하고 어색했던 것처럼 누구나 지금 당장의 나 자신이 가장 편하니까요. 
 
  하지만 문제는 지금 내가 느끼는 편안함으로 인해 누군가가 불편을 느끼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의미 없이 내뱉었던 ‘아직도 연애 안 해?’라는 말 한마디에 상처받는 이가 주위엔 있었으니까요. 기자가 불편함을 전달하며 큰 부담을 느꼈던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누구도 달가워하지 않을 감정이라는 것을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무의식 속에 자리한 연애지상주의, 자연스럽게 사용해 온 빠순이라는 표현, 유행어처럼 사용한 ‘XX충’이라는 단어 그리고 재미로 즐겼던 단톡방 속 여성혐오까지. 별일 없던 자신의 일상을 지적하는 기사가 편히 읽힐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자는 역효과에 대해 걱정하기보다 공유된 불편함이 변화시킬 현실을 기대하고 싶습니다. 설령 누군가 그 불편에 화를 낼지라도 소외됐던 불편이 많은 사람의 의식에 공유된 것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앞으로도 당신만이 당연한 당신께 소외된 작은 불편을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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