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의 글쓰기』|강원국 저|메디치미디어|2014년 02월
한 원로 철학 교수님과의 점심식사 자리였다. 이번학기 매호 기고문을 작성해주시는 분이었다. “편집장님은 매주 그렇게 글이 나오세요? 저는 매주 기고문을 쓰는 게 꽤 큰 부담이 됩니다.” 연륜과 학식에서 비교가 안 되는 교수님의 난처한 질문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재빨리 다른 주제로 화제를 넘겼다.

  나름대로 훈련받아왔다던 글쓰기지만 커서의 깜빡임 앞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조급해진다. 결국 또 그저 그런 이야기를 깊은 고뇌와 사유 없이 기계적으로 써내려가게 된다. 써내려간다는 것에 대한 익숙함은 때론 무서운 권태감으로 돌변해 펜 끝을 흐린다. 글의 진정성은 사라지고 공감은 요원한 일이 된다.

  하다못해 학보사 편집장도 이러한데 한 나라를 이끄는 대통령이라면 어떨까. 카메라 셔터 소리와 노트북 타이핑 소리만 지배하는 고요 속 대통령의 연설문 발표 순간이면 국민의 눈은 대통령의 입을 향한다. 정치권을 어슬렁거리는 평론가라는 자들은 대통령의 단어 하나를 놓고 몇 시간 동안이나 말들을 만들어낸다. 수많은 음모론적 혹은 삼류 소설적 이야기를 쏟아내고 나서야 그들의 입도 조용해진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이 한낱 부질없는 추론과 무의미한 망상이었다는 공분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게 된 감정이다. 연설문 수정 정도는 인정해도 괜찮다고 판단한 것일까. 언론 보도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발 빠른 사과였다. 이런 상황에서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의 “나도 친구 얘기 듣고 쓴다”는 말은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국민의 생각이 대통령의 글을 향한 진정성에 대한 의심으로까지 미치게 되자 분노는 걷잡을 수 없었다. 배신감에 치를 떠는 시간이 속절없이 지나갔다. 18대 총선에서 벌어진 친박 공천 학살 당시 그 유명했던 대통령의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는 말을 이제는 되돌려줘야 할 때가 된 것 같기도 하다. 대통령이 속였고 국민은 속았다.

  대통령의 글쓰기가 그 최소한의 진정성마저 의심받는 것처럼 지난달 26일 발표된 양캠 총학생회 시국선언문의 진정성이 의심받고 있다. SNS상에서는 총학생회의 시국선언문을 조롱하며 첨삭한 글이 공감을 얻고 있다. 주술의 불일치, 비판하는 지점의 추상성, 맥락과 모호한 헌법 인용. 이 모든 기술적인 결함을 다시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는 글의 진정성이 의심받는 데엔 근본적인 원인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총학생회는 섭섭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마냥 섭섭해만 할 일은 아니다. 그동안 양캠 총학생회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선 소극적이었다. 故 백남기 동문 분향소 설치에 유달리 인색했다. 타대 총학생회가  합동 분향소를 설치하고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는 와중에도 중앙대만 고요했다.

  안성캠 총학생회도 학내 이슈에 대해 소극적이라는 지적이 종종 있어왔다. PRIME 사업 당시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최근 생공대 사태가 이토록 커질 때에도 어떤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하지 않았다. 안성캠 내 3개의 단대밖에 없는 상황에서 생공대의 문제라면 당연히 무언가를 했어야 했다. 지금까지의 이런 소극적 태도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결국 이번 시국선언문 사태에서 드러났다.

  이 지난하고 처참한 시국에 한 권의 책이 차트 역주행을 하고 있다. 『대통령의 글쓰기』다. 텍스트에 대한 배신감을 다시 텍스트로 위로받는 상황이 아이러니하다. 이 책의 한 챕터의 제목은 ‘살아온 날을 보면 살아갈 날이 보입니다-진정성으로 승부하라’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글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글쓴이의 진정성이다.

  글쓰기가 매번 완벽할 수는 없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먼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이는 배워서 되는 문제가 아니다. 어휘가 풍부하지 못 해도, 구성이 완벽하지 않아도, 멋들어진 미문이 아니더라도 좋다. 마음 속 깊이 우러나오는 국민 혹은 학생에 대한 존경과 시국에 대한 진심어린 걱정만 있으면 된다. 대통령의 연설문에는, 그리고 총학생회의 시국선언문에는 아쉽게도 그것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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