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 전 그 신화와 같은 오래된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0분경 총탄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신화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다. 대통령이 곧 어버이요 국가였던 시대가 허망하게 끝났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18년 장기독재의 끝은 하룻밤 사이에 결정됐다. 다음날 아침 라디오 유고 방송이 나오자 대학생들은 그렇게들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뛰어다녔다고 한다.
 
  드디어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이성의 시대가 왔음을, 억압과 통제의 시대에서 자유와 해방의 시대가 왔음을. 숨 막힐 듯한 군사정권이 끝나고 민주주의의 시대가 왔다고 모두가 잘 알지도 못하는 민주주의를 기대했다.
 
  하지만 기대는 이내 절망으로 바뀌었다. 또 다른 군사 쿠데타가 이뤄졌고 또 다른 군사정권이 들어섰다. 그리고 그 신화 같은 죽음은 결국 대통령을 신화로 박제화시켰다. 중화학 공업 중흥, 중동 특수, 수출 100억 달러 달성, 한강의 기적 등 개발독재의 신화적 단어들은 구천을 떠나지 못했다.
 
  흉탄에 스러진 어머니와 아버지의 영정을 들었던 그가 다시 국민 앞에 선 것은 1997년이었다. IMF 경제 위기가 온 나라를 우울 속으로 침전시키던 그때 말이다. “아버지가 이룩한 나라가 이토록 어려운 걸 보니 나오지 않을 수 없다”는 신화의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말과 함께 말이다. 그때 그 시작이 이렇게 비극으로 종결될지는 아무도 몰랐을 테다.
 
  하지만 부박한 한국의 정치 풍토가 그 신화 시대의 복원을 꿈꿨다. 이념과 가치랄 것도 없는 한국의 보수정당이 억지로 그를 떠밀었다. 차떼기 당을 구원할 구원투수로 등장한 후 그는 ‘선거의 여왕’이란 칭호를 얻었다. ‘선거’라는 민주주의 시대의 단어와 ‘여왕’이라는 제국의 시대에서 나올법한 단어의 이질적인 결합이었다.
 
  21세기 민주주의와 첨단과학기술의 시대에 청와대 구중궁궐에서 다시 신화 같은 이야기가 벌어지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대통령의 연설문에 사인(私人)의 붉은 때가 묻어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대기업들은 알 수 없는 두 재단에 몇백 억이 넘는 출연금을 냈다. 그렇게 37년 후 다시 접하게 된 신화의 시대는 말 그대로 믿기 힘든 신화 같은 이야기들뿐이다. 신화의 시대를 역사서에 기록하지 못하고 다시 현세에 끌어들였던 탓이다.
 
  이제 이 모든 신화의 시대와 작별할 때가 온 것 같다. 대통령은 더 이상 국정을 운영할 여력이 없다. 어떤 쇄신도 이 미증유의 사태를 수습할 수는 없다. 도덕성의 타락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기란 불가능하다. 대통령의 지력 자체를 의심하는 국민마저 있는 상황이다.
 
  지금의 사태가 인적 쇄신이나 혁신적인 변화로 해결되기 어려운 이유는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대통령 본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역대 대통령과 관련된 각종 측근 비리와 이번 사태는 본질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측근 비리는 뼈를 깎는 마음으로 자신의 관계를 쳐낼 수야 있겠지만 어찌 이게 그렇게 해결된 문제인가. 혼란을 줄이며 이제는 그 모든 권한을 스스로 내려놓아야할 때다. 탄핵보다야 하야의 형태가 신화의 시대를 더 질서정연하게 끝내는 법일 것이다.
 
  다시 대한민국의 새로운 좌표를 마련할 때다. 신화의 시대 이후 대한민국은 근본적으로 달라진 적이 없다. 정치는 이번 사태의 원흉과 다를 바 없어 말할 필요도 없다. 대통령과 관련된 각종 추문이 연일 터지는 상황에서 저마다 대통령과 선긋기에 나선 저 여당의 행태를 보라. “나는 예견했다”, “그런 줄 몰랐느냐”, “내가 말하지 않았냐”는 등의 할 필요도, 해서도 안 될 가증스런 말들이 정치권을 부유하고 있다. 또다시 이해득실에 따라 헤쳐 모이는 중이다.
 
  신화의 시대와 영원히 작별할 때가 왔다. 분골쇄신으로 나라를 다시 세워야 한다. 우상과 광신의 시대를 이제는 끝내야 한다. 신화의 시대에서 파국의 시대를 거쳐 다시 이성과 과학의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 대통령은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국민에겐 그 정도의 지성은 있다. 대통령의 담화문처럼 대한민국이 영원해야 한다면 대통령의 유한함을 증명하는 게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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