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20세기를 대표하는 한 명의 한국 작가를 꼽으라면 누구를 말할 건가요?” 기자가 누구를 말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을 때 오창은 교수(교양학부)는 주저 없이 횡보 염상섭을 꼽았다. 오교수의 전공은 60~70년대 한국현대소설이므로 염상섭의 작품들은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지만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염상섭을 연구하고 있다. 이번주 강의실 밖 산책에서는 오교수가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로 염상섭을 당당히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들어봤다.
 
시대를 향한 면밀한 관찰과 고찰
20세기 한국문학의 심장이 되다
 
오교수의 서재에는 12권의 염상섭 전집이 책상과 가장 가까운 책장에 나란히 꽂혀있다. “사실은 학생들에게 염상섭 전집을 추천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절판됐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어요.” 오교수의 눈에서 왠지 모를 씁쓸함이 느껴졌다. 이제 염상섭의 작품은 단편이나 중편을 모아 엮은 소설집을 통해서만 출판되고 있다. 하지만 오교수는 소설집을 통해서라도 염상섭을 한 번쯤 깊이 읽어보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염상섭은 어떤 작가일까. 오창은 교수와 함께 염상섭이 머물렀다는 상도동의 옛 거주지에 직접 찾아가 횡보 염상섭의 자취를 더듬어봤다.
 
   
면밀하고 끊임없는 기록의 문학
  작가가 작품 속에 구현하는 세계는 작가를 둘러싼 시대와 무관할 수 없다. 인간은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작품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손에서 탄생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염상섭은 어떤 시대를 살아왔을까. 염상섭은 1897년 서울 종로 필운동에서 태어나 1921년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1963년 성북동 자택에서 타계하는 해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염상섭뿐만 아니라 김동인, 이상, 채만식, 현진건, 심훈, 김유정 등 많은 작가가 20세기 문학사에 유의미한 발자국을 남겼다. 그러나 오교수는 횡보의 행보가 20세기 전체를 관통한다는 데 주목했다. “염상섭은 192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도, 193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도, 전후소설의 대표주자도 아니에요. 그는 20세기 자체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신의 삶 전체를 문학과 더불어서 살아간 작가죠.” 
 
  염상섭은 일제강점기, 해방기, 한국전쟁기, 1950년대 전후, 4·19 혁명으로 대표되는 민주화 초창기를 모두 경험했다. 그리고 1921년부터 1963년까지 약 40년간 작품이 성공하든 성공하지 않든 창작활동을 지속했다. 시대를 살아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면밀히 ‘관찰’하고 그것을 자신만의 언어로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관은 흔히 ‘사실주의’로 해석되고 실제로 그가 작품 속에 구현해놓은 세계는 섬뜩하리만치 세밀하고 사실적이다. 단순히 응시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면밀히 관찰해놓은 자만이 기록할 수 있는 경지의 문장들이 작품을 빼곡히 메우고 있는 것이다. 
 
  1946년에 발표한 『해방의 아들』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해방기의 혼란한 상황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일본인이면서 조선인인 혼혈인의 정체성, 소련과 미국이라는 지배 체제 아래서의 내적 갈등, 친일 행위를 했던 사람들과의 불편한 관계, 해방 후 어떻게 국가를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드러내고 있다. 
 
  『양과자갑』은 한국전쟁 이후 미군정기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미국에서 들어온 신생 물품에 대한 탐욕, 미국이라는 새로운 권력에 대해 굴종하는 인물들을 통해 해방기의 민중들이 미국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식을 당대의 관점에서 그려냈다.
 
  『두 파산』은 정신적인 파산, 경제적인 파산이라는 두 개의 파산을 의미한다. 염상섭은 작품을 통해 정례어머니와 옥임이라는 두 인물의 ‘파산’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변해가고 어떻게 세속화돼 가고 있는지를 파헤치고 있다. 
 
  추운 날씨임에도 기자와 오창은 교수는 교수연구실을 나서 중앙대 후문 쪽으로 향했다. “염상섭 작가가 1959년부터 1960년 11월까지 살았던 곳이 바로 상도동이었어요.” 오교수는 직접 지도를 들고서 염상섭의 살았던 터를 찾아 나섰다. 앞으로 걸어가는 그를 쫓느라 기자가 금세 지칠 만큼 걸음걸이가 거침없었다. 마음 깊이 존경하는 문인의 흔적을 쫓는 또 다른 문인의 뒷모습은 땅거미가 내려앉은 어두운 골목 아래서도 빛이 났다. 도착한 곳에서 마주한 건물에는 시대를 풍미했던 문인의 옛 거주지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그 어떤 증거도 없었다. 그러나 그 짧은 여정을 통해 기자는 잠시나마 횡보의 자취와 숨결을 상상할 수 있었다. 
 
 
 
낱낱이 묘사한 감시의 시절
  오창은 교수는 『만세전』이 염상섭의 시대를 바라보는 면밀한 시선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만세전』의 제목은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3·1 만세운동 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민감한 시기를 다루고 있는 만큼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했죠.” 염상섭은 처음엔 『신생활』 1922년 7월호에 ‘묘지’라는 이름으로 연재를 시작했지만 이내 검열에 의해 중단되고 2년 후인 1924년 ‘시대일보’에서 ‘만세전’으로 끝까지 연재했다. 
 
  “『만세전』을 통해 일제강점기라는 억압의 시대를 추상된 언어로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자세하고 생동감 있게 접할 수 있어요. 특히 당대 지식인이 일본 경찰에 의해 어떻게 감시받았는지를 알 수 있죠.” 『만세전』 속 주인공인 ‘나’(이인화)는 일본에서의 유학생활 중 아내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길에 오른다. ‘나’는 귀국길에 지속적으로 일본 관헌의 감시와 검문을 받는다. 끈질기고 극심한 검문으로 급기야 차라리 일본사람으로 보였으면 이와 같은 감시를 피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나’는 아내가 위급하다는 소식에도 슬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귀국길을 주저하기도 하고 동경에서 평소 자주 만나던 ‘정자’라는 웨이트리스를 찾아간다. 또 고베에서는 ‘을라’라는 여성과 재회하기도 한다. 오창은 교수는 이와 같은 ‘나’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위는 자유로운 연애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면서 아내의 죽음을 가급적 회피하려는 욕망의 발현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가부장적인 질서를 거부하고 사랑 없이 일찍 결혼한 자신의 처지에 대해 회의하는 인물이에요. 근대적 이성을 지닌 인물로서 자신을 독립적 주체로 바라보려 하지만, 현실이 자신을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죠.”
 
  오창은 교수는 염상섭이 『만세전』 속에 설정한 이인화의 모습은 근대적 자아의 특성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근대 문학의 특성은 허구적인 인물을 통해 자기 내부의 이야기를 표출하는 것이다. 독자들이 느끼기에 이인화는 분명 모순적이고 여기엔 작가 염상섭의 강한 의도가 담겨 있다. 이인화라는 인물을 통해 자기 내부의 목소리가 모순적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곁에 있다
  일제강점기가 막을 내리고 해방기와 한국전쟁이 지나간 후, 염상섭은 민주화의 소용돌이가 시작되는 시대를 목격한다.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에 대항해 4·19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염상섭은 4·19 혁명 당시 원로 문인으로서의 위치에서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칼럼 등을 통해 목소리를 냈다. 1959년에 ‘경향신문’이 정치적 탄압을 받자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고 4·19 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60년 4월 25일에는 ‘대도로 가는 길’이라는 글을 ‘동아일보’에 발표해 학생들의 혁명을 지지했다. 
 
  이렇듯 눈으로 목격한 혁명을 입으로 외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던 그가 가장 가까이서 4·19 혁명을 느꼈을 공간으로 지목되는 곳이 바로 다름 아닌 상도동이다. “4·19 혁명으로 뜨거웠던 당시, 염상섭은 지금의 중앙대 후문으로부터 걸어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상도동에서 살고 있었어요. 중앙대와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혁명 당시 중앙대 내에서 울려 퍼지던 의혈의 외침을 못 들었을 리가 없죠.” 
 
  오창은 교수는 당시 염상섭의 행보는 한국 사회에 대한 자신의 관점이 담겨있다고 말했다. “염상섭은 정국의 안정도 바랐지만 민주국가에 대한 열망 역시 강했어요. 한국 사회에 대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기 관점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려고 하는 태도를 잃지 않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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