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스는 ‘인간은 모든 만물의 척도이다’라고 말했다. 모든 인간의 생각은 각각 다르고 자기 편향적일 수밖에 없으며 인간은 그것을 곧 진리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척도에서 벗어난 것들을 무척이나 두려워한다. 척도에서 벗어난 무언가가 자신에게 위협적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기 때문이다. 이는 원초적인 생존 욕구에 따른 것으로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갓난아기가 우는 이유도 이와 같다. 아기는 배가 고프거나 잠이 와서 울기도 하지만 태어나 처음 만난 사람에게 억지로 안겨야 할 땐 두려움 때문에 운다. 그러나 아기는 수없이 타인에게 안겨지고 관계를 맺으며 첫 만남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된다. 이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배운 사소하지만 결코 가볍게 보면 안 될 생존 방법이다.
 
  인간이 자신의 당연한 생존 욕구를 극복하지 못했을 땐 재앙이 오기도 한다. 두려움을 혐오로 승화시킨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수많은 사람이 차이로 인한 ‘모름’을 ‘혐오’로 해소하려 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홀로코스트의 중심에 서 있던 아돌프 히틀러, 백인우월주의를 주장하는 KKK단, 일제강점기 관동대학살을 일으킨 일본인까지. 그리고 최근 동성애 혐오자가 일으켰던 올란도 총기 난사 사건 또한 모름을 혐오로 해소하려 했던 이들의 소행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혐오는 결국 실패했다. 유대인을 학살했던 히틀러의 생은 권총 자살로 끝났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은 패했다. KKK단이 살해했던 남성의 아들인 마틴 루터 킹은 흑인해방운동을 이끌었다. 그리고 일본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광복을 맞았다. 끝내 혐오는 그들의 바람대로 인간을 동일화시키지 못했다. 또한 역사는 혐오가 옳은 방법이 아닐뿐더러 성공할 수 있는 방법도 아니란 것을 방증한다.
 
  만약 당신이 지금 무언가를 혐오하고 있다면 골똘히 생각해보자. 무언가에 대한 혐오가 사실 당신이 모르는 것이기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지. 또는 다수에 의해 휩쓸려 누군가를 혐오한 것은 아닌지. 실제로 당신이 두려움을 맞서기 위해 또는 다수에 휩쓸려 혐오론자가 됐다면 기자는 그것은 답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학기 심층기획부에서는 우리들의 잃어버린 이해와 공감을 회복하기 위해 사회에서 배제당하고 심지어 혐오 당하는 소수자들을 다뤘었다. ‘비연애자’부터 ‘호구’와 ‘일코하는 빠순이’까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보는 것만으로도 기자 자신과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기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혐오하기에 앞서 적어도 생각할 기회는 필요하다. 당신은 생존 기제에 따라 무언가를 혐오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혐오가 본연의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사실은 대상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이를 구분할 잠깐의 시간 정도는 가져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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