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핍한 주머니 사정에 학기 중 아르바이트를 알아봤다. 낮에는 바쁘니 새벽잠을 줄여 신문 배달을 하자는 생각했다. 돈도 벌며 아침 운동도 하고 남는 신문도 가져와 읽자는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자존심이 세다는 말을 들어서일까.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배급소에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남들 다 자는 시간에 일어나 배달을 하며 돈을 번다는 생각에 뿌듯했고 밤길을 걸으며 어깨를 으쓱거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새벽잠이란 어찌나 달콤하던지. 2시 30분부터 울리는 알람을 끄고 일어나기란 무척 힘든 일이었다. 하루는 그토록 나를 깨우던 알람 소리가 들리지 않은 적도 있었다. 이상한 기분에 침대에서 튕겨 나와 확인한 시계는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배달 시간을 맞추려면 늦어도 3시 30분에는 집에서 나가야 했는데 말이다. 헐레벌떡 자전거를 타고 새벽 공기를 가르며 나는 나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결국 한 독자의 항의 전화를 받게 됐다. 신문을 들고 초인종을 누르자 문을 연 한 여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조롱의 헛웃음을 지었고, 뒤에서 식사하던 남자는 나에게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나에 대한 혐오감이 차올랐다. ‘배달 시간도 못 지키는 주제에! 너 자신에 대한 책임감이 있긴 한 거니?’ 그 후 신문 배달은 나를 옭아매는 가시 철창이 됐고, 매일 아침 두 시간은 희망찬 하루의 시작이 아닌 끔찍한 고문이 돼버렸다. 새벽잠이 아쉬워 늦게 나가는 꼼수를 부리기도 했다. 그럴수록 자신이 싫어지며 혐오스러워졌다.
 
  모임에서 만난 한 누나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자, 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못 지킬 때 자기 자신이 혐오스러워지지. 자신이 싫어지면 모든 게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진단다.” 그 누나의 말이 맞았다. 나에 대한 혐오가 나의 꿈과 희망을 집어삼킨 것이다. 돈을 벌어 의미 있게 쓰자는 꿈은 짜증에 덮인 지 오래였고 집에 가져오는 신문은 펼쳐지지도 않은 채 폐휴지로 버려졌다.
 
  짜증 속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이유를 잃어버린 나는 신문 배달을 그만두기로 했다. 후임자를 구할 때까지 열흘 하고도 며칠을 더 고생하고서야 나는 비로소 새벽의 고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요즘 사회와 청년들을 돌아보면 신문 배달을 하던 내 모습이 생각난다. ‘헬조선’, ‘탈조선’이 사회의 뜨거운 키워드이며 이 땅에는 답이 없다는 등 비관적인 언어만이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우리는 왜 스스로를 미워하는가. 아마 나처럼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사회에 대한 분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분노가 비관과 좌절, 혐오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무런 개선도 가져오지 못할뿐더러 우리 자신과 사회의 기(氣)를 오히려 상실시키기 때문이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를 느낀다면 적극적으로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며 희망찬 미래를 꿈꿔보는 것은 어떨까? 특히나 우리 청년(靑年)들이 먼저 말이다.
한동민 학생
경제학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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