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14일에 있었던 민중총궐기 중 故 백남기 선배가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중태에 빠졌었다. 그리고 지난달 25일, 그는 결국 돌아가셨다. 그의 죽음에 관해 많은 말들이 오갔다. 혹자는 백남기 선배를 범법자라고 칭하며 그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선 안 된다고 한다. 혹자는 경찰 조직과 정부가 그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말들이 쌓이고 쌓여 사안은 더욱 알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로부터 무엇을 알 수 있을까? 과거 근대 형법의 원칙은 ‘10명의 범죄자를 놓쳐도 1명의 무고한 시민을 만들어선 안 된다’였다. 하지만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과거 근대에서 시행됐던 형법에 담긴 정신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반대로 스탈린의 충성스런 부하였던 니콜라이 예조프의 모토인 ‘10명의 무고한 사람을 만들어도 1명의 스파이를 놓쳐선 안 된다’가 지켜지는 듯하다. 
 
  故 백남기 선배가 범법행위를 저질렀기에 그의 죽음은 인과응보라고 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우리는 죄형 법정주의와 무죄 추정의 원칙이 철저하게 무시되는 현실을 목격할 수 있다. 불법 혐의를 저질렀다고 의심받는 이유만으로 그를 범법자로 낙인찍고 그의 죽음이 ‘그가 자초한 일이다’라고 말하는 태도는 중세 전제군주제의 법률에 불과하다. 
 
  다음으로 원자화되고 파편화된 사회의 단면을 볼 수 있다. 그의 죽음 속에 국가 폭력이 자리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책임은 개인에게 전가되고 있다. 그의 딸 백민주화 씨가 투약 행위를 중단한 것을 백남기 선배가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으로 보고 사회는 그녀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 결정의 배경이 된 그녀의 안타까운 사연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투쟁에 중심에 서야 할 중앙대 학생 사회의 대응은 소극적으로 보인다.
 
  일견 이해는 간다. 점점 학생 사회는 축소되어가고 있다. 학과 학생회조차 그 존재가 유지되기 힘들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구조적 강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학생들에게 모두 투사가 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러나 비겁자가 되어선 안 된다. 니체가 말한 자신의 일차적 욕구 충족밖에 남지 않은 최후의 인간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독일 나치의 중령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엔 지극히 평범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삶에서 알 수 있듯이 실존이 아닌 생존만이 목적이 되었을 때 그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닌 짐승의 삶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학생 사회를 재조직해야 한다. 소모임, 학회, 학과 학생회 등이 다시 활기를 찾아야 한다. 일주일에 한 번은 모임을 가지고 토론하고 의견을 교류하고 공부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대학생은 사회의 ‘인텔리젠타(Intelli-genter)’로 사회 변혁의 전위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체 게바라가 했다고 알려진 말을 떠올린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Realist)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엔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정웅태 학생
 
영어영문학과 학생회장
영어영문학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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