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힐링’의 시대이다. 삶의 질에 대한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이제 사회 전체를 선도하는 모범적 인간상보다 다양한 형태의 삶의 가능성이 주어지고 각자가 자신의 길을 찾아가려는 노력이 눈에 띄게 늘어간다. 이를 반영하듯 인생의 멘토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소중한 행복의 길을 담아 세상에 전파하고 있다. 때로는 자신의 고유한 체험에, 때로는 종교적 교리에 기댄 다양한 형태의 행복론이 서점가에 등장하고 있다. 행복의 길을 공유하겠다는 것이 결코 나쁠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과연 이것이 가능한 것일까? 오히려 ‘넘치는 행복’, ‘행복의 과잉’을 염려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독일 현대 철학자 펠만(F. Fell-mann)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인생의 지혜나 처세술을 다룬 유명한 책을 통해 실제로 아무런 도움도 결코 받지 못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힐난하고 있다. 
 
  행복의 과잉이라는 현상의 이면에는 현대가 불행이 보편화된 시대라는 메시지가 있다. 도처에 아픈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누군가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외치지만 늙어도 아픈 건 매한가지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저주하는 수사(修辭)에서부터 다양한 형태의 불행의 표현들이 난무한다. 이런 과정에서 점차 삶과 현실에 대한 불만은 깊어만 간다. 그런데 그들이 그리는 행복한 시절과 사회의 원형(Arcetype)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러한 불행감이 많은 부분 청년실업과 같은 생활고와 암울한 미래에 기인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 외적 조건으로 이러한 불행의 원인을 돌리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헤르더(J. G. Her-der)는 인간을 ‘결핍존재(M둵gelwesen)’로 정의한다. 이런 관점은 인간 본성과 이성의 기원을 탐구하는 철학적 인간학의 고찰에서 ‘결핍’이 인간발전과 진화의 토대라는 것으로 정식화된다. 물론 흙수저, 금수저 논쟁이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이런 발상이 소박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소박한 것은 단순한 이분법일 수도 있다. 오히려 인간의 내면에서 성공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영국의 철학자 샤프츠베리 백작(Earl of Shaftebury)은 행복이 부분적으로 우리 자신으로부터, 부분적으로 외적 사물로부터 생겨난다면 모든 것을 고려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전제한다. 그런데 우리가 모든 것을 수중에서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면 단순히 우리 자신에 달린 ‘선과 미를 위한 열정’과 같은 내적 미덕에 확실한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가 일방적으로 내적 미덕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미덕을 행하는데 수반되는 제반 조건들을 검토하는 작업이 바로 철학 자체라고 할 만큼 수많은 제한을 잘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내면성의 강조는 궁극적으로 ‘자신에 대한 존경’에서 비롯된다고 다음 세대 독일 문필가 크니게(A. F. Kni-gge)는 해석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인간 내면의 열정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면서 스페인 출신 사제인 그라시안(B. Gracian)은 ‘환멸의 체험’(Desengano)을 내세운다. 그는 불필요한 유혹에 휩쓸리지 말고 냉정하게 살기를 주문한다. 프랑스 도덕주의자의 원조인 라로슈푸코(La Rochefoucauld)의 ‘폭로의 심리학’은 소위 ‘위장된 악덕’인 ‘미덕의 파괴’를 주창할 뿐만 아니라, 모든 행위의 배후에는 자기 관심과 자기애가 숨겨져 있다고 간파한다. 이것은 이성에 기대는 인격적 고결함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문제시하는 통찰이다. 그야말로 인간의 본질을 직시하라는 요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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