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위해 사는 것은 행복한 일이에요.” 이승하 교수(문예창작전공)가 교도소와 소년원을 다니며 교화사업을 한 지 어느덧 10년이 다 돼간다. 그리고 그 10년의 시간동안 그의 삶에 부목이 되어 준 사람이 있다. “내 목을 자를지언정 상투를 자를 수는 없다!” 바로 조선시대 위정척사파의 대표학자인 면암 최익현 선생이다. 이번 주 이교수와 함께 산책하게 될 책은 그가 직접 집필한 책 『마지막 선비 최익현』이다.   
▲개강을 이틀 앞둔 바람이 살랑 부는 어느 날, 이승하 교수와 함께 산책을 했다.

부산에서 약 45.9km 떨어진 섬 대마도에는 한국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2015년 대마도를 찾은 우리나라 관광객은 20만 명이 넘었을 정도다. 미우다 해변, 이즈하라 시내에 있는 티아라몰, 한국전망대 등의 장소에는 한국 관광객이 끊임없이 북적인다. 북적이는 관광지를 떠나면 ‘수선사’라는 한적한 절이 있다. 이 절에는 쓰시마에서 순국한 면암 최익현 선생을 기리는 3단의 비석이 있다. 최익현 선생은 1906년 7월에 대마도에 당도하여 단식 투쟁을 하다 숨을 거둔다. 왜 그는 우리 영토가 아닌 대마도에서 죽음을 맞이했을까. 도대체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교수님이 직접 쓰신 책이라 더 재밌게 읽었어요.
  “문예창작전공 교수인 제가 엉뚱하게 역사책을 썼기에 이 책으로 함께 산책하고 싶었어요.”


  -시를 가르치는 교수님께서 역사책을 쓰시다니…. 뜻밖이었어요.
  “문학사를 가르칠 때 역사를 모르니까 답답하더군요. 진학사와 서울신문이 함께 전국 고등학생 506명을 대상으로 ‘한국전쟁이 남침인가, 북침인가’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어요. 약 69%의 학생이 ‘북침을 했다’라고 답했더라고요. 이렇게 학생들의 역사에 대한 의식이 박약해지고 있어요. 그래서 한국 근현대사 공부에 몰두하며 책을 쓸 생각을 하게 됐죠.”
 

  -실제로 한국사에 관심을 갖는 학생들도 많진 않잖아요.
  “그래요. 학생들이 점점 우리 역사를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죠. 우리는 역사 공부를 소홀히 하고 있는 반면 이웃 나라 일본은 역사 공부를 굉장히 중시해요. 그들은 일본이 이 땅을 지배했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교과서를 통해 배워요. 많은 학생이 백제와 오랫동안 교류했단 걸 배운 뒤 부여나 공주로 수학여행을 오기도 하죠.”
 

  -일본과의 영토분쟁에서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학생들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해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나라를 빼앗기게 됐는지’, ‘왜 일본을 막지 못했는지’ 알았으면 해요. 최익현은 그 과정에서 한결같이 나라와 백성만을 생각한 인물이었죠.”
 

  -맞아요. 50년에 걸쳐 왕에게 상소문을 올린 건 정말 놀라워요.
  “상소문을 쓰는 데 목숨을 거는 용기가 필요했어요. 역사상 왕과 신하가 그렇게 긴 세월 동안 상소문과 답서를 통해 관계를 이어온 경우가 없죠. 특히 최익현이 쓴 시무12조 등의 상소문은 조선조 말 당시만의 것이 아니에요. 오늘날까지도 지도자의 솔선수범과 반성을 촉구하며 우리를 일깨우는 현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죠.(웃음)”

“신이 듣자옵건대 이번에 맺은 강화가 저들의 애걸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는 강함이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서 우리가 저들을 제어할 수 있으니 그 강화를 믿을 수 있지만, 강화가 우리의 약점을 보인 데서 나온 것이라면 이는 주도권이 저들에게 있는 것으로서, 저들이 앞으로 우리를 제어할 것이니 그런 강화를 믿을 수 없습니다. 신은 잘 알 수 없거니와, 오늘의 강화는 저들의 애걸에서 나온 것입니까? 우리가 약점을 보인 데서 나온 것입니까? ”

  -스승 이항로의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그 스승에 그 제자인 거죠. 성리학 사상에 입각해 왕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우리가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을 ‘위정척사파’라고 하죠. 위정척사파였던 이항로가 제자 최익현에게 면암(勉菴)이란 호를 지어줘요. ‘벼슬을 하려 애쓰지 말고 한평생 암자에서 도를 닦는 수도승처럼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이죠. 한마디로 말해 의에 죽고 참에 살라고 가르쳤어요.(웃음) 최익현은 그 가르침대로 살아갔고.”
 

  -의병장으로서 최익현의 모습도 인상적이었어요.
  “맞아요. 뻔히 질 줄 알고 있었지만 그가 나라를 지키는 최후의 방법은 의병 봉기였어요. 백발의 75세 노인인데도 자기 건강과 집안을 걱정할 겨를이 없었죠. 우리가 일어섰다는 것을 보여줘야 외국도 우리를 도울 거라 생각해 의병을 모아요. 이토 히로부미 앞으로 일본의 잘못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따져 묻는 편지도 써서 보내죠. 미리 질 줄 알고 있었지만 목숨을 내놓는 것이 마지막 애국이라고 생각하고 의병을 일으켰던 거예요. 최익현의 장례식장에선 이토가 만사(輓詞)를 지어 존경심을 표하기도 했죠.”
 

  -한 사람이 한평생 흔들림 없이 살긴 쉽지 않잖아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람이 불면 흔들리죠. 특히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초심을 잃고 변절하기 쉬워요. 일제 강점기 말에 친일파로 돌변한 문인이 약 80%가 넘어요. 대신들의 다수가 개화파가 되거나 나라의 이권을 외국에 넘겼어요. 하지만 이때 최익현은 초지일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이들과 싸웠어요. 그에겐 오로지 외세의 침탈에서 백성들을 구해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죠.”
 

  -마음이 먹먹해요. 그렇게 국가를 위해 살다 결국엔 외딴 타지에서 순국하시잖아요.
  “안타까운 일이죠. 선생의 흔적을 찾기 위해 대마도를 방문한 적이 있어요. 수선사란 절이 있더라고요. 최익현 선생이 순국하고 부산으로 시신을 운구하기까지 영구를 안치했던 곳이에요. 하지만 130일 동안 이 섬 어디서 거처했는지 알 길이 없었죠. 한평생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순국했는데…. 참 허망했어요. 한국면암학회 회원이 주축이 돼 사찰 묘원에 비 하나 세운 게 다예요.”
 

  -우리가 마음으로 최익현 선생을 기릴 필요가 있네요.  
  “맞아요. 그의 딸깍발이정신을 배워야 해요. 그게 옹고집이라고 해야 할지 똥고집이라고 해야 할지.(웃음) 국가가 제대로 서 있어야 나와 내 가족도 사는데 우리는 애국심을 구시대의 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지식인이라면 많이 배운 사람이잖아요. 조금이라도 타인에게 보탬이 되는 존재가 돼야 하죠. 모두 그렇게 살아가면 우리 사회가 깨끗해지고 사람들이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요.”
 

  -늘 생각은 쉬워요.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건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그래서 최익현이 대단한 거죠. 고민만 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겼잖아요. 수없는 난관에 부딪혀도 오직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그들을 위해 일했죠. 죽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 난 것은 먹지 않겠다고 단식투쟁하다가 부산에서 쌀과 배추를 가져오자 비로소 입에 댔어요. 무실역행. 지식인의 참모습을 실천한 것이죠. 최익현을 알면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가 많이 줄어들 겁니다.(웃음)”

이교수가 추천하는 또다른 책

 

     『감시와 처벌의 나날』        이승하 저 | 실천문학사

이 교수가 1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교도소와 구치소, 소년원 같은 곳에 봉사활동을 다니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시로 써 한 권의 시집으로 묶어냈다. 또한 저자의 가까운 집안사람이 정신신경과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그가 30년 동안 병원에 면회를 다니면서 쓴 시도 담겨 있다. 미셸 푸코의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제목을 가져와 시집의 제목을 『감시와 처벌의 나날들』로 삼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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