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모로 보나 시간 낭비인 짓을 하고 있는데도 당신은 웃고 있군요. 그렇다면 그건 더 이상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말이 의도치 않게 팬들 사이에서 명언이 됐다. 흔히 시간 낭비라고 여겨지는 팬심을 유지하는 데 그의 말이 큰 힘이 됐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을 향한 팬의 사랑을 낭비라고 여기기엔 팬 활동이 만들어내는 외부효과를 간과할 수 없다. 학위 없는 전문가 혹은 능력자로 불리는 덕후들 중에서도 연예인을 좋아하는 팬은 다방면의 능력으로 사회·문화적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팬심에서 비롯된 사랑이 자신과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커져 나아갔다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네가 빛나서 나는 행복해
  대체로 연예인을 좋아하는 팬의 사랑은 일방적인 희생으로 여겨진다. 팬이 연예인을 위해 쓴 많은 돈과 시간에 비해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꼬집으며 ‘이 한심한 빠순이야!’라고 그들을 비난하기도 한다. 이민정 씨(가명)는 자신이 아이돌 팬이라는 이유만으로 주변에서 “그런다고 걔가 널 봐줄 것 같아!”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비난에 굴하지 않고 “걔네도 우리 알고 있어”라고 대응했다. 자신의 이름을 외우고 자신의 바람을 들어주는 연예인과 충분한 소통이 이뤄진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팬은 단지 연예인을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도 행복을 느낀다. 가수 엑소(EXO)의 팬인 남지현 학생(가명·수원과학대)은 엑소의 멤버를 닮은 인형과 일상을 함께하며 사소한 즐거움을 얻는다. “친구들과 만날 땐 인형과 함께해요. 귀여우니까 친구들도 좋아하죠.” 가수 원더걸스(Wonder Girls)의 팬 강은지 학생(가명·서울여대) 또한 팬 활동을 통해 삶의 보람을 얻는다고 말했다. “새 앨범이 나오면 스트리밍을 하고 시청자 투표에 열심히 참여해요. 그 결과로 원더걸스가 음악방송에서 1위를 하면 정말 뿌듯하고 뭉클해지죠.” 

 『빠순이는 무엇을 갈망하는가』의 저자 강준만 교수(전북대 신문방송학과)는 팬 활동이 순수한 열정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고 말했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놀이 본능’이 있어요. 그러나 효용성이 없다는 이유로 연예인을 좋아하는 마음은 규제받곤 하죠. 효용성도 중요하지만 ‘카르페 디엠(Carpe Diem)’의 원리가 필요해요. 여기서 놀이의 의미는 ‘그저 놀자’가 아닌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불안에 얽매이지 말고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즐기자는 뜻이죠.”

  ‘덕심’이 피워낸 꽃
팬 중에서도 공연, 사인회 등의 공식 석상에 나타난 연예인의 사진을 찍어 공유하는 팬들이 있다. ‘홈마(홈페이지 마스터)’라고 불리는 이들은 화려한 조명 아래 빠르게 움직이는 연예인의 생생한 모습을 홈페이지에 올려 수많은 팬과 공유한다. 가수 빅스(VIXX)의 팬인 이민정 씨(가명)는 홈마로서 활동하며 많은 능력을 갖추게 됐다고 말했다. “저는 사진이나 디자인,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어요. 좋아하는 피사체를 담기 위해서 현장에서 부딪히며 배운 거죠. 어떤 취미생활을 하는 사람보다 빠순이들이 가진 잔재주가 많아요.”

  강준만 교수는 인간은 어떤 분야에서든 인정을 통해 자기만족을 느낀다고 말했다. “삶은 남들의 인정을 받기 위한 투쟁 즉 ‘인정투쟁(struggle for recognition)’의 연속이에요. 현재의 인정 기준은 금력과 권력 중심으로 획일화돼 있죠. 그러나 모두가 동일한 인정기준을 따를 필요는 없어요.” 팬들은 사회의 인정 기준을 벗어나서도 팬 활동을 통해 인정받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었다. 가령 이민정 씨는 사진의 수많은 피사체 중 연예인을 선택한 이유로 외부의 즉각적인 반응을 꼽았다. “사진을 게시하면 방문자들이 ‘오빠 사진 예쁘게 나왔다’고 바로 호응해주니까 더 열심히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연예인에 빠진 팬이 사진의 준전문가가 되기까지는 든든한 덕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민정 씨가 사용하는 카메라는 400만 원을 호가한다. 게다가 연예인의 사진을 찍기 위해선 4kg의 카메라를 들고 4시간을 넘게 대기하는 일이 다반사라고 말했다. “경제적, 체력적으로 힘들 때가 있어요. 그렇지만 덕심으로 이겨내는 거죠.” 팬들은 어떠한 경제적인 보상이 없음에도 덕심 하나로 자신의 열정과 능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윤명희 교수(숭실대 정보사회학과)는 이들의 순수한 열정의 근원을 팬덤 문화가 여성팬들의 자아 표출의 장이자 놀이의 영역이 된다는 점에서 찾았다. “젠더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선 상대적으로 여성들이 자신을 드러낼 때 낙인에 대한 심리적 억압을 받고 있어요. 그래서 비공식적인 팬덤 공간은 이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숨겨놨던 욕망과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 되는 것이죠.” 실제로 여성들은 팬 활동을 통해 거침없이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함께 나누고픈 사랑
  과거에는 팬덤이 연예인에게 값비싼 선물 공세를 하는 식의 사랑 표현이 주를 이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연예인을 통해 기부하는 문화가 새롭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긍정적 변화의 원인으로 윤명희 교수는 팬덤의 연령대가 확장되고 있는 점을 꼽았다. 팬덤들을 분석해보면 팬들의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팬덤의 사회적 공헌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한다는 설명이다. “어렸을 때는 단순히 오빠가 좋아서 했던 일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과 뜻깊은 의미를 나눠보고 싶다는 것까지 나아가는 것이죠.” 일례로 비교적 연령층이 높은 김연아 팬덤은 유니세프에 6천만 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삼촌팬, 이모팬이라는 용어가 생겨날 만큼 팬덤 문화는 과거 미성숙한 청소년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다양한 연령, 성별의 사람들에 의해 향유되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 기여를 통해 자신이 주고받은 사랑의 가치를 세상에 나누고 있다. 윤명희 교수는 더는 팬덤 문화가 젊은 여성들이 좋아하는 한심한 영역으로 생각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팬덤 문화는 특정 연령층만이 즐기는 하위문화가 아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취미의 한 종류로서 존중받아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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