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중앙게르마니아 강연 취재를 다녀왔다. 허버트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을 주제로 한 독일어문학전공 김누리 교수의 강연이었다. 강의실에 들어서기 전까지 강연은 단순한 취재 대상이었지만 강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마르쿠제의 통찰에 감탄하며 빠져들었다. 순간마다 취재가 우선이라는 생각을 놓칠 정도였다.

  마르쿠제는 자본주의사회체제가 개인의 사유 능력을 빼앗고 그들을 지배 계층 마음대로 움직이도록 조종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상태를 ‘총체적 지배’로 표현했다. 총체적 지배는 다섯 가지 지배 수단을 이용해 이뤄지는데 그중 하나는 ‘전도된 언어’다.

  전도된 언어는 ‘말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일깨워 준다. 언어를 장악한 자는 곧 개인을 조종할 힘을 가진다. 언어를 장악한 자의 말은 개인의 사고를 좌지우지하고 지배 계층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도록 하는 명령으로 기능한다.

  학생이 아닌 취재 기자로 강의실에 앉아 언어의 숨겨진 힘과 기능에 대해 들으니 그 의미가 사뭇 다르게 와 닿았다. 그리고 슬며시 부담이 느껴졌다. 이 강의실을 나가고 나서 나는 어떤 언어로 무엇을 말할 것인가. 나의 언어가 지면에 실려 누군가의 정신에 닿을 것을 생각하자 집어 든 펜이 묵직해졌다.

  강연을 듣고 나니 더 이상 ‘기레기’란 단어가 가볍게 보이지 않았다. 정확한 사실의 전달보다 자극적인 언어를 통해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급급한 기자를 조롱하는 말인 기레기. 기레기라는 단어가 우리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으로 보아 현재 우리나라 언론의 실태를 짐작할 수 있다.

  개인의 정신을 조종할 만한 거대한 힘을 가진 언론이 과장을 보태서 ‘부패’했다고 가정했을 때, 기레기라는 말이 자주 쓰이는 상황을 마냥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 마르쿠제가 말한 총체적 지배에 대항할 가능성이 그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 사회의 개인들이 지배 계층의 총체적 지배에 빠져들어 마르쿠제가 말한 대로 완전히 ‘사유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다면 그들은 결코 언론의 문제를 짚어낼 수 없다. 그야말로 언론이 말하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비판해야 하는 이유를 깨닫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판받아 마땅한 기사를 써내는 기자를 향해 기레기라고 외칠 수 있다면 우리는 아직 안심할 만하다. 언론에 잠식당해 비판 의식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방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레기를 향한 치열한 비판은 계속해서 날카로워져도 괜찮다.

  학내 소식을 전하는 학보사 기자로서 언어가 가진 거대한 힘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관한 고민은 언제까지고 쉽지 않을 것 같다. 다만 그 힘을 억압과 기만이 아닌 발전과 자유를 향해 겨눈다면 언론인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기자는 기자의 자리에서 언어의 힘으로 긍정을 빚고 독자는 독자의 위치에서 날카로운 비판을 놓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총체적 지배’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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