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누리 교수가 강의가 끝난 후 학생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정신의 조작을 이용한
‘총체적 지배’
허위 욕구로 꺼져버린
혁명의 불씨

자유민주주의체제 아래서 우리는 사유와 욕망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진정으로 ‘나’의 사유와 ‘나’의 욕망을 좇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자신에게 그와 같은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일차원적 인간’일 가능성이 크다.

  히틀러의 광기 어린 폭력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프랑크푸르트학파 허버트 마르쿠제는 그곳에서 전에 본 적 없는 새로운 인류를 발견한다. 스스로 사유하지 않는 인간. 마르쿠제는 사회로부터 사유 능력을 박탈당한 미국인을 목격했다. 미국인들로부터 사유의 자유를 박탈한 보이지 않는 힘은 그의 저서 『일차원적 인간』에서 그 실체가 드러난다. 지난 24일 302관(대학원) 301호에서 김누리 교수(독일어문학전공)가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사유하지 않는 인간
  1933년 독일의 역사는 거대한 단절을 겪는다.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수상 자리에 오른 것이다. 유대인 지식인으로서 독일에 머물 수 없었던 마르쿠제는 제네바를 거쳐 1934년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미국 땅에 발을 내디딘 마르쿠제는 경악했다. 자유를 찾아 도착한 미국에서 ‘사유하지 않는 인간’을 처음으로 마주했기 때문이다. 사유하지 않는 인간은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스스로 사유·판단하지 못하고 사회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인간을 의미한다. 유럽에서 평생을 살아온 마르쿠제에게 사유하지 않는 인간은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 충격은 나치의 폭력을 목격했을 때보다도 컸다. 마르쿠제에게 미국인이란 그야말로 새로운 ‘인간 종’이었던 것이다. 그는 새로운 인간 종을 ‘일차원적 인간’으로 명명했다.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깊게 파고들었다. 일차원적 인간들은 분명히 사회에 완전히 종속돼 있었는데 그 배후가 보이지 않았다. 나치는 물리적 폭력으로 개인을 지배해 폭력의 주체가 확실했지만 미국 사회가 개인을 지배하는 수단은 물리적 폭력이 아니었다. 미국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의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르쿠제는 현대의 지배 방식이 물리적 폭력에서 심층심리의 관리로 이행하고 있으며 여기서 일어나는 욕망의 조작이 개인의 사유를 잠재웠다는 인식에 이르렀다. 의식과 무의식을 조작·통제하는 거대한 기구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리적 폭력에 의한 지배가 아닌 정신의 조작을 통한 지배. 이때 개인을 억압하는 감독관은 철창 밖이 아니라 개인의 머릿속에 있다. 마르쿠제는 이런 지배 방식을 ‘총체적 지배’로 표현했다.

 

  총체적 지배
  『일차원적 인간』에서 마르쿠제는 ‘선진산업사회가 질적 변혁을 어떻게 억제하는가’에 집중했다. 선진산업사회란 후기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던 미국 사회를 뜻한다. 또한 질적 변혁은 곧 혁명을 의미한다. 마르쿠제의 연구는 후기자본주의사회가 미국인들을 어떤 방식으로 억압해 혁명의 싹을 잘라내는가에 대한 고찰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마르쿠제는 선진산업사회가 ‘총체적 지배’를 통해 혁명의 가능성을 봉쇄한다고 주장했다. 총체적 지배는 ▲전체주의적 민주주의 ▲기술합리성 ▲탈승화된 문화 ▲전도된 언어 ▲조작된 의식 등 다섯 가지 범주로 나뉜다. 총체적 지배의 다섯 요소는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사회 구성원의 의식을 조종한다. 의식을 지배당한 개인은 곧 사유 능력을 잃고 지배층의 노예로 전락한다.

  노예화된 개인은 사회가 정해준 욕망과 행동양식만을 따르게 된다. 문제는 개인이 자신의 욕망과 행동양식을 자신의 자유 선택에 의해 결정했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자기 삶의 모든 판단과 결정이 사회로부터 기획됐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개인은 ‘진정한 혁명이 성취될 수 있는 조건이 현실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시대’에도 사회를 향해 고함치지 못한다.

  전체주의적 민주주의
  마르쿠제는 총체적 지배를 구성하는 다섯 범주 중 하나로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를 제시했다. 양극에 서있는 두 정치 체제를 한데 묶은 총체적 지배의 정치 형태는 역설적으로 느껴진다. 마르쿠제는 전체주의가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유물이 아니며 자유민주주의 사회도 전체주의적으로 관리된다고 말한다.

  전체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전체주의를 실현한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테러와 공포를 통해 전체주의적 사회를 구축했다. 반면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변혁의 욕망 자체를 희석·변형시키거나 궁극적으로는 거세함으로써 전체주의적 사회를 만들어 낸다.

  욕망의 거세는 개인에 대한 ‘허위 욕구’의 주입으로 실현된다. 허위 욕구는 개인을 억압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특정 사회 세력이 개인에게 부과하는 욕구를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지배집단이 부과한 욕구를 자신이 스스로 원하게 된 욕구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마르쿠제에 따르면 개인이 가진 욕구는 대부분 지배계급이 부여한 허위 욕구에 불과하다. 허위 욕구는 개인에게 고된 노동과 공격성, 궁핍, 불의를 영속시킨다. 개인은 허위 욕구를 채우며 만족과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는데 그것은 사실상 불행의 한가운데서 느끼는 병적 쾌감과 같다.

  마르쿠제는 끊임없이 허위 욕구를 채우기 위해 갈망하는 상황을 ‘생산물에 의한 교화’로 표현했다. 인간 교화의 주체가 인간이 이끄는 당이나 국가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생산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낸 상품에 되레 속박돼 버렸다.

  생산물에 종속된 인간은 자신의 영혼을 자기 자신의 소유물에서 발견한다. 개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동차, 하이파이 세트, 실내에 2층 계단이 달린 주택, 주방기구 등에서’ 자신의 영혼을 발견한다. 사회는 더 좋은 상품, 더 비싼 상품, 더 새로운 상품을 욕망하도록 계속해서 조장하며 개인을 완벽하게 통제한다.

  전체주의적 민주주의 체제의 일상을 사는 개인에게 가장 치명적인 점은 비판적 이성이 점차 약화돼 결국은 소멸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인간해방은 비판적 이성이 정신에 충만할 때 비로소 가능성을 얻는다. 하지만 개인의 정신은 사회 지배층에 의해 물적 욕망으로 빈틈없이 채워진다. 이런 현실에서 인간해방을 위한 혁명의 불씨는 애초에 타오를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일차원적 인간과 한국사회
  『일차원적 인간』은 혁명이 부재한 현대적 상황의 원인을 미국 사회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 분석을 통해 해명하고자 쓰였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러 그가 지적한 총체적 지배 시스템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 놀랍도록 부합한다. 한국이 사회 다방면에서 미국을 모델로 삼아 왔으며 사회를 작동시키는 이데올로기 또한 미국의 것을 그대로 들여왔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사실상 마르쿠제가 말한 바와 같이 ‘진정한 혁명이 성취될 수 있는 조건이 현실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시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 일상에서 빈부 격차의 심화, 노동시장의 이원화, 보장되지 않는 여성인권과 같은 말들은 완전히 내재화돼 당연한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우리는 현실에 문제가 많다며 불평하면서도 사회를 바꾸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지금 우리는 자신의 사유로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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