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正義)로운 인간
  • 중대신문
  • 승인 2016.09.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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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대는 ‘정의로운 시대’는 아니지만 ‘정의의 시대’, 즉 정의가 시대의 화두가 되는 시대이다. 정치와 경제의 제도와 같은 사회시스템이 자기실현과 재화의 분배라는 정의 구현에 결정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구성원 각각의 실천적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개인의 역할은 이념적 실천의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생활세계에서 실천해야 할 올바른 삶의 방식도 함축한다. 이를 위해 먼저 공통감각(Sensus Communis)이 회복될 필요가 있다. 철학자 가다머(H.-G. Gadamer)는 공통감각을 “모든 인간에게 살아있는 올바름과 공공(公共)의 복리에 대한 감각이며, 더 나아가서 공동의 삶에 의해 획득되고 삶의 질서와 목표에 따라 결정되는 감각”으로 정의한다. 쉽게 표현하면 공통감각은 공동체의 현실적인 삶을 정의롭게 인도하는 능력이다. 이러한 공통감각에 기초한 정의를 네 가지 범주로 정식화할 수 있다.

  먼저 ‘분수(分數)를 지키는 삶’이다. 사회적 분배와 연관된 많은 문제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배분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 즉 ‘각자가 자기에게 맞는 몫’을 넘어 탐욕을 가질 때 생겨난다. 분수의 사전적 정의는 ‘사물을 분별하는 슬기’와 ‘자기 신분에 맞는 한도’이다. 전자는 자신의 지위와 위상에 걸맞게 적절한 역할을 찾는 노력이자, 시의적절하게 새로운 ‘상식’을 구현하는 판단력이다. 후자는 이 판단력을 토대로 구체적인 실천의 기준과 항목을 자신의 과제로 설정하는 노력이다. 분수란 지키면 지킬수록 자기만족과 더불어 사회적 동의와 존경을 확보한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우리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에 대한 기대도 잘 알고 있다. 

  둘째, ‘어울리는 삶’이다.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오늘날 소위 ‘혼술’과 ‘혼밥’이 유행한다. 사회학자 바우만(Z. Bauman)은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낯선 타자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에 “정말로 마음에 드는 공동생활을 꾸려 살기 좋은 삶을 만들어 내기 위한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를 고안해서 시도하고 실험해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그는 이런 과정에서 참여 자체를 거부하는 ‘믹소포비아’(Mixophobia)의 선택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이 선택은 배타적인 태도를 옹호하게 되며, 심지어 현실문제의 해결능력마저 상실케 한다.
 
  셋째, ‘절제된 언어의 사용’이다. 언어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특히 개인이나 집단을 향한 파괴적인 언어적 공격의 폐해를 우리는 수없이 경험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의 ‘품격’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아도르노(Th. Adorno)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친절한 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배려”를 실천하는 것이 인간의 공동생활을 원활하게 하는 “화해적 요소”로서 선물을 주는 행위와 같다고 평가한다. 절제된 언어의 구사가 공동체 구성원들의 상호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가정과 학교 그리고 사회에서 언어 습득과 사용 전반에 대한 교육적 성찰이 요청된다.
 
  넷째, ‘교감하는 삶’이다. 공동체적 삶에 있어서 편견과 선입견의 문제는 심각하다. 인간 삶에서 차이가 상수(常數)이기에 완전히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만 이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증폭될 경우 공동체 생활의 거대한 장애이자 벽이 되기도 한다. 지난 세월 우리는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부담하면서 그 폐해를 절실하게 경험했다. 러셀(B. Russel)은 민주주의의 난제 중 하나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편견에 아첨하지 않는 신문은 읽지 않으며, 결국 그들이 얻는 지식은 자신의 선입견과 열정만 확증해주는 지식일 뿐이라고 꼬집고 있다. 그러므로 서로의 이해의 폭을 넓히려는 개방된 자세는 정의로운 민주 사회를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우리는 제도와 인간성이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강요된 최선’이 아니라 ‘합의된 차선’을 정의로운 사회의 출발점으로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소학』에도 ‘자신이 행하기 싫으면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勿施於人)’라는 구절이 있다. 따라서 ‘정의의 시대’는 갈등의 시대를 주도했던 독점, 독백, 독설, 독단의 파토스를 청산해야만 ‘정의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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