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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중대신문이 만난 사람
김정민 명창(국악과 87학번)외곬에 핀 소리꽃은 타협을 불허한다
임지원 기자  |  jela04089@cau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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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9.25  03: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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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우리의 것이지만 왠지 가깝게 느껴지진 않는다. 한복을 차려입은 소리꾼이 몇 시간 동안이나 어렵고 동떨어진 옛이야기를 늘어놓는 장면이 연상된다. 그러나 김정민 명창은 결단코 말한다. 판소리는 우리의 핏속 깊이 흐르고 있는 정신이자 삶의 소리라고. 창자(唱者)와 소리, 관객이 하나 되어 펼쳐지는 드라마이자 예술이라고. 김정민 명창은 특유의 입담과 진솔한 이야기로 판소리가 지루하고 재미없다는 편견을 무참히 깨뜨렸다. 더 이상 판소리는 고루한 것이 아니다. 전통의 보존과 계승, 그리고 판소리의 대중화를 위해 36년을 꿋꿋이 걸어온 그녀를 만나봤다.
 
   
 

 

 

 

 

 

 

명창의 길은

음과, 뼈를 깎는

소리 조각가의 길
 
 
대중성과 보편성을 지니는 예술

판소리의 세계화를 꿈꾸다
 
 
 
판소리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흥보가’ 이수자 김정민은 성인 남성들도 하기 힘들다는 완창 공연을 2년 반 동안 무려 6번이나 해냈다. 3시간에서 5시간까지도 걸리는 한 번의 완창을 위해 에어컨 없는 방음실에서 매일 6시간 이상 소리 연습을 해야 했다. 단 하루의 예외도 없이.
 
  -완창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내 음악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작업이에요. 내가 내 음악에 만족했을 때 관객도 만족할 수 있어요. 절정에 치달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음을 다듬고 가꿔나가야 해요. 한 번의 완창을 준비하려면 매일같이 연습을 해야 되는 거잖아요. 나와의 싸움인 거죠.”

  -완창 연습은 어떻게 하나.
  “방음실에서 연습해요. 옛날엔 산에 들어갔지만 요즘 시대에 산공부를 하러 갈 순 없으니까요.(웃음) 한번 들어가면 몇 시간씩 연습하니까 땀에 흠뻑 젖어 나오죠. 디테일한 음정 하나하나를 찾아내서 깎아내는 훈련이에요.”

  -고된 작업이다.
  “그렇죠. 하지만 저는 소리를 낼 때만큼은 너무 재미있고 행복해요. 그만큼 소리는 제 인생의 전부예요. 공기와 같은 거죠. 아마 음악에 빠진 사람이나 자기 일에 빠진 사람이나 같은 감정일 거예요. 하루도 연습을 안 하면 우울증에 걸릴 걸요.”

  -보통 완창 후엔 탈진한다고 하는데.
  “아니, 탈진해야 하는데…. 탈진하는 게 아니라 공연이 끝나면 ‘요부분은 이렇게 해야 했는데!’ 하면서 또다시 방음실로 들어가게 돼요. 공연 후에 북을 쳐주시는 선생님이 ‘김명창 괜찮은거냐’며 전화하셨는데 오히려 그분의 목이 더 쉰 거예요. 괜찮다고, 방금 목 풀었다고 그랬더니 좀 쉬엄쉬엄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오늘도 연습을 하고 나왔나.
  “그럼요.(웃음)”

  -판소리의 어떤 점이 그리 매력적인가.
  “판소리는 모노드라마예요. 무대 위에선 남자도 되었다가 여자도 되었다가 어른도 되고 아이도 될 수 있어요. 이렇듯 내 안의 모든 걸 보여줄 수 있다는 게 매력이죠. 그리고 판소리는 랩이기도, 재즈이기도, 테크노이기도, 가요이기도 해요. ‘흥보가’ 중 휘모리장단은 랩과 같고, 자진모리장단은 테크노와 같죠. 이렇듯 판소리 안엔 모든 음악적 요소가 녹아들어 있어요.”
 
  -어떻게 그런 여린 몸에서 천의 소리가 나오는지 신기하다.
  “공연이 시작하면 전 여러 명이 돼요. 어떨 땐 다섯 명이 되기도, 어떨 땐 열 명이 되기도 하고요. 맘씨 여린 흥부가 됐다가, 못된 놀부가 됐다가도 하죠. 무대에 오르면 내가 아닌 것 같아요. 완전 무대체질인가 봐요.(웃음)”

  -극 중 인물에 완전히 몰입하는 듯 하다.
  “무대에선 하나도 창피하지 않아요. 연습할 땐 무대에서 하는 것처럼, 무대에선 연습하는 것처럼 해요. 거울을 놓고 연습하는 제 모습을 떠올리며 공연하죠. 그걸 다 쏟아내고 나면 몸이 개운해지고 가벼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수 시간짜리 분량을 모두 외워야 하는데.
  “그렇죠. 모두 외워야 해요. 근데 어릴 땐 쉽게 외워지더니 마흔이 넘으니까 잘 안 외워져요. 처음 완창 공연할 때 갑자기 딱 한 사설이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큰일 났죠. 그래서 객석에 앉아계시는 저희 선생님께 물어봤어요, 공연 중에. ‘선생님 그담에 뭐여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거긴 그거다! 아따 너 재미있게 한다잉!’ 이러시는 거예요. 재치 있게 넘겨서 천만다행이었죠.”

  -추임새가 참 구수하다.
  “판소리 공연 중에는 관객들이 ‘얼씨구’, ‘좋다’, ‘잘한다’고 하면서 소리꾼에게 힘을 실어주죠. 직접 참여하고 공감하며 함께 공연을 만들어나가는 거예요. 얼마나 흥이 넘치는데요.(웃음)”
 
 
  제가 아파서 노래 연습을 못 했었던 적이 있었는데 죽을 뻔했어요. 갑자기 노래를 안 하니까 삶에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았죠. 가족들이 연습도 못 하게 철통 경비를 하는데, 우울증에 걸릴 정도로 힘들었어요.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데, 어서 내 노래를 다듬어야 하는데’ 하면서요. 그래서 몰래 연습을 했더니, 살아났어요. 갑자기 슬픔이 막 밀려와서 식구들한테 우울한 이야기도 하고 그랬는데 사실은 연습을 못 해서 그랬던 거죠. 연습하고 나니까 세상이 다시 완전히 밝아진 거 있죠.(웃음)
 

   
 

   -언제부터 국악을 했나.
  “초등학교 5학년 때 시작했어요. 전엔 서양음악 쪽에 관심도 많았는데 엄마가 가야금을 한 번 배워보지 않겠냐고 권유하셨어요. 엄마도 원래 경기민요를 하셨는데 아버지 반대로 그만두셨거든요. 그래서 엄마는 그게 항상 가슴의 한이 된 거예요. 저라도 국악을 하길 원하셨죠. 그래서 처음엔 가야금으로 국악을 배웠어요.”

  -가야금에서 어떻게 판소리로 전향하게 됐나.
  “가야금을 하다 보니 그 가락이 너무 흥미로운 거예요. 그래서 국악에 입문하고 국악예고에 들어갔죠. 고등학교 때 경기민요, 시조, 판소리, 가야금병창 등 다양한 장르의 국악을 해볼 기회가 있었어요. 제가 워낙 활동적이라 무대를 이리저리 휘저으면서 하고 싶었는데, 그게 딱 판소리더라고요. 가야금은 앉아서만 하잖아요. 그래서 다른 공부도 하지만 판소리에 더 전념하게 됐어요.”

  -판소리로 중앙대 국악과에 입학했다.
  “당시엔 판소리는 한 명밖에 안 뽑았었어요. 경쟁률이 너무 치열해서 죽도록 연습하는 수밖에 없었죠. 그 시절엔 집에 연습실이 없었어요. 대신 연탄 광에 들어가서 연습을 했는데 매일 코가 새까매져서 나왔죠.(웃음) 아니 근데 중앙대에 오니까 방음벽으로 된 연습실이 있어서 맘껏 소리를 질러도 된다는 거예요. 새벽같이 와서 연습하고, 점심에 도시락 싸서 가서 도시락 먹으면서 연습했어요.”

  -연습벌레였다.
  “가야금에서 전향했으니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 했죠. 친구들이 내리에 가면 식당에 갈 수 있는데 왜 너는 매일 도시락을 싸오냐고 했는데, 사실 밥 먹으러 가는 시간도 아까웠어요. 연습하는 게 너무 행복했으니까요.”

  -예쁨 받는 학생이었겠다.
  “선생님들이 굉장히 예뻐하셨죠. 판소리는 거의 호남 쪽에서 성행했잖아요. 제 고향은 호남이 아니라 강원도 원주거든요. 그래서 더 예뻐하시고 끌어가려고 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융통성이 없고 좀 꽉 막힌 데가 있는 게, 당시 김소희 선생님(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춘향가 예능보유자)이 절 이수자로 데려가고 싶다고 하셨는데 거부했어요. 너무 황당하죠. 어린 고집에, 선생님 힘으로 크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선생님 그늘에서 크는 건 쉬운 길일 것 같은 거예요. 선생님이 괘씸하다고 하셨죠.(웃음)”

  -어린 나이에 패기가 대단하다.
  “되돌아가는 길이라도 이렇게 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내가 연습해서 터득한 소리,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소리로 길을 걷고 싶었죠. 제가 선택한 길이지만, 생각보다 너무 고되더라고요. 4학년 때 대사습(전국판소리명창대회)에 나갔는데 선생님 그늘이 없어서 차상을 받기도 했어요. 후에도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죠.”

  -어렵게 살아왔다.
  “원래 성격이 좀 그래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융통성도 없고 곧이곧대로 하려고 하죠. 졸업 후에도 국립 창극단에 입단했는데, 그냥 포기서를 쓰고 나와 버렸어요. 당시 판소리계의 큰 스승인 김소희 선생님께서 ‘너를 무대의 주인공으로 키우겠다’고 해서 입단 시험을 봤던 건데, 문득 ‘내가 굳이 이틀 안에 들어가서 뭐가 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더군요. 남들은 들어가지 못해 안달인데, 저보고 미쳤다고 그랬죠, 다들. 하지만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은 없어요. 타협하지 않은 덕분에 지금 제 소리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입단을 포기하고 나와 무얼 했나.
  “우선 모교인 국악예고로 향했어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내 음악의 모자란 부분을 더 깎고 다듬기로 했죠. 아이들은 저를 통해서 배우지만 저도 아이들을 통해서 배우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제가 생각했을 땐 아직 제 노래엔 깎아야 할 부분이 많았어요. 당장 무대에 있을 게 아니라 모교로 가서 더 많은 공부를 하고자 출강을 결심했죠. 그 가운데 명창의 삶과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다룬 국악영화 <휘모리>를 찍게 됐어요.”
 
  -<휘모리>로 대종상 영화제 신인여우상을 받기도 했다는데.
  “네. 원래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으려 했어요. 감독님이 제 이야기를 듣고 오셔서 주인공을 하자고 먼저 제안하셨는데 말이죠. 영화라는 게 괜히 상업적인 것 같아서 부정적인 인식이 있었거든요. 내가 영화를 찍을 필요가 뭐 있나 싶었죠. 근데 제 제자 하나가 제 사진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기랑 같이 응모를 해버렸어요. 전 몰랐는데 갑자기 감독님이 전화하셔서 ‘아니 안한대매!’ 하시는 거예요. 결국 2,800대1로 뽑혀서 국악예고 제자들과 함께 출연하게 됐어요.”

  -휘모리를 계기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게 됐다.
  “당시 각종 언론사에서 인터뷰가 엄청 쏟아졌었어요. 예능 출연제의도 상당히 받았죠. 근데 하나도 응하지 않았었어요. 이경규가 진행하는 예능에서 섭외가 왔을 때도 괜히 난 ‘예술인인데, 왜 예능에 나오라는 거지. 영화 봤으면 됐지 나한테 무슨 할 말을 들으려고 만나자는 걸까’라면서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도대체 모르겠지만요. 지금 생각하면 영화 관계자들한테 굉장히 미안해요. 그때 융통성을 좀만 발휘했다면 <휘모리>가 더 흥행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요즘 후회해요.(웃음)”

  -상당히 자기 주관이 뚜렷하다.
  “그래서 남들은 건방지다고도 이야기해요. 제 딴엔 이게 바르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뿐인데 남들이 볼 땐 건방지게 보일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잃은 게 좀 많아요. 지금은 안 그러려고 노력 중이지만요.(웃음)”
 
 
  전 항상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겠다고 다짐해왔어요. 창본에 ‘서양음악보다 우리 음악이 훨씬 뛰어나다. 우리 음악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난 그런 사람이 되겠다’며 혈서도 쓰고 그랬거든요, 너무 웃기지 않아요?(웃음) 전 그래서 정말 판소리가 어렵다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판소리는 정말 재밌고 훌륭한 음악이에요. 쉬워요. 노래 부르듯이 부르면 돼요. 판소리는 피를 토해야 하고 똥물을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아니에요, 지금 똥물 먹으면 독이 올라서 죽죠.
 
 
   
 

  -실제로 판소리 공연은 정말 재밌다. 가보기 전엔 모르더라.
  “사람들이 판소리가 재밌다는 걸 모르기 때문에 제가 강연을 하는 거예요. 97년부터 지금까지 강연도 하고 방송 강의를 통해 국악이 어렵다는 이미지를 벗기 위해 많이 노력했죠. 판소리가 얼마나 재밌는지 알려주려고요. 재즈부터 피아노, 트로트 등 서양음악까지 여러 음악을 제가 직접 선보이면서 판소리와 비교해 설명하죠. 그 음악들이 모두 있는 게 판소리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요.”

  -강연 내용은 무엇인가.
  “먼저 국악의 요소와 조선 후기부터 음악이 흘러온 양상을 설명하고 서양음악의 요소를 비교해요. 보통 직접 선보이며 타 음악 요소가 모두 국악에 포함돼있다는 걸 알려주죠. 국악은 보편성을 지니는 음악이라고요. 우리의 음악을 느끼고 즐길 수 있게끔 추임새도 유도해요. 덧붙여 조선 후기부터 음악이 흘러온 양상을 설명하고 2편에선 판소리를 더 깊게 공부하죠. 그럼 우리 음악에 대해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돼요. 아주 재밌게 들어주시죠.”

  -뿌듯하겠다.
  “판소리의 참맛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뿌듯함을 느껴요. 처음에는 ‘판소리 하는 사람이 젊고 세련됐네’라는 이미지로 절 쳐다봤다가 ‘어? 꽤 재밌네? 판소리에도 저런 부분이 있구나, 신기하다’라고 했다가 강연을 마칠 때쯤이면 ‘아, 정말 좋구나’라고 해주시죠. 의미와 재미를 함께 전달하는 강의라고 해두죠.(웃음)”
 
  -기억에 남는 강연이 있나.
  “모두 기억에 남죠. 아, 그중에서도 공직자 강연이 생각나네요. 공직자분들은 굉장히 딱딱해요. 한 5분 동안 아무 동요도 없이 경직돼서 앉아계시거든요. 근데 한 10분 지나면 슬슬 풀어져서 음악을 즐기는 자세가 돼요. 결국 함께 우리 소리의 즐거움을 느끼고 함께 즐기는 분위기가 됐죠. 강연이 다 끝나고 나면 제가 유명한 스타도 아닌데 많은 분들이 절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재미있고 인상 깊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판소리의 재미를 알았으면 좋겠다.
  “호남이든 영남이든 어디 할 것 없이 대한민국 누구든 우리 민요 한마디, 판소리 한 구절 할 수 있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에요. 그래서 전국을 순회하며 무료로 강연하고, 공연하죠.”
 
 
  ‘흥보가’ 보유자이신 박송희 선생님께 가서 동편제를 공부했어요. 동편제는 기교를 부리기보다는 소리 자체를 통성으로 힘 있게 내질러 소리하는 것이 특징인데, 구절의 끝마침이 쇠망치로 끊듯이 명확하고 상쾌해요. 그전엔 강산제, 김세종제 등을 공부했었는데 동편에 전념해보고 싶었어요. 박송희 선생님께 ‘흥보가’, ‘적벽가’, ‘숙영낭자전’을 사사 받았고 그때부터 완창이란 걸 시작하게 됐죠.
 
 
   
 
 
  -판소리 꿈나무들에게 수상 상금을 모두 주고 오기도 했다.
  “제19대 송만갑 판소리 고수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었어요. 근데 보니까 판소리가 하고 싶은데 여유가 안 돼서 한복도 못 지어 입고 있는 친구들이 있는 거예요. 너무 안타까웠어요. 저도 저런 시절이 있었거든요. 학창시절, 향사 박귀희 선생님을 통해 장학금을 받고 공부하면서 크면 꼭 선생님처럼 후배들을 도우며 살겠다고 다짐했던 저 자신을 떠올렸어요. 항상 선생님처럼 주변을 따뜻하게 살피는 국악인이 되겠다고 마음에 굳게 새겼었거든요. 그래서 수상 상금을 그 아이들에게 주고 왔어요.”

  -참 좋은 일을 하셨다.
  “아이들이 그 상금으로 한복을 지어 입은 걸 봤는데, 뜻깊은 일은 하는 건 참 좋더라고요. 강연도 좋고 공연도 좋지만 좋은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죠. 제가 할 수 있는 건 판소리뿐인데 판소리로라도 주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을까 해서 소아암 돕기 공연 등을 개최하기도 했어요. 공연비와 모금액은 모두 소아암 치료를 받는 아이들을 위해 전달했죠.”

  -요즘은 다들 자기 것만 챙기기 바쁜데 마음 씀씀이가 넓다.
  “요즘 세상은 스승과 제자도 없고 선후배도 없고 형제간의 우애도 없다지만 내 일이 아니더라도 서로 챙기고 사랑하면서 함께 사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저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박귀희 선생님은 전 재산을 모두 기부하고 돌아가셨거든요. 저도 돈을 많이 벌어서 많이 도와줄 거예요. 동생이 그거 벌어다 모두 기부할 거냐고, 정작 제 몫은 잘 못 챙긴다고 하는데 사실 제건 챙길 게 없어요. 전 노래만 하면 행복하기 때문에.(웃음)”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지난해 9월에 세종문화회관에서 ‘흥보가’ 완창 공연을 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네요. 원래 독주나 판소리 공연은 스피커랑 마이크가 빵빵 울리는 체임버홀에서 해요. 그렇지만 오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너무 많아 인원을 수용하려다 보니, 체임버홀이 너무 작아서 판소리 완창으로는 최초로 M시어터에서 하게 됐어요. 그런데 그곳에서도 600석이 꽉 차서 넘치는 거예요.”

  -인기가 대단하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와주실 줄은 몰랐어요. 근데 M시어터는 체임버홀과는 달리 천장이 뚫려 있어서 소리가 먹히는 구조예요. 그래서 굉장히 힘들었죠. 근데도 불구하고 600석 기립박수를 해주셨어요. 잊을 수가 없죠. 그래서 다음엔 대극장에서 한번 해보려고요.(웃음)”

  -정말 기분이 좋았겠다.
  “아, 판소리 되는구나! 이러면서 간을 키워놨죠. 지금 2년 9개월 동안 여섯 번의 완창을 끝냈어요. 이제 곧 오는 12월에 ‘적벽가’ 완창을 하고 나면 7번의 완창을 하는 거죠. 앞으로 2년 안에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완창하고 마지막으로 그 다섯 바탕을 한 달 안에 한꺼번에 무대에 올리겠다는 계획을 세웠어요.”

  -36년을 했다. 이젠 본인의 음악에 만족하는지.
  “아니요. 아직도 다듬고 완성하는 중이죠. 보통 제 나이 정도 되면 CD도 내고 하는데 전 안 냈어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소리를 내보이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조금만 더 깎고 다듬어서 저 자신이 만족하는 날이 오면 하려고요.(웃음)”

  -퓨전 국악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저도 예전엔 퓨전을 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어요. ‘퓨전이라도 해서 우리 음악을 들려줘야 할까’라고요. 근데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판소리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했던 음악이잖아요. 그럼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 아녜요. 충분히 내 음악 속에는 이미 대중성과 보편성이 존재하는데 굳이 퓨전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시대에 맞게 조금 더 깎고 가다듬어서 세계적인 음악으로 만들 거예요. 제 음악은 아직 미완성이지만 언젠가 완성이 된다면 새로운 시도는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아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 길은 물론 굉장히 힘든 길이에요. 많은 사람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혼자와의 싸움을 해야 하죠. 그래서 많은 후배들이 딴 길로 가보기도 해요. 그렇지만 우리 전통의 뿌리는 잃지 않고 가져갔으면 좋겠어요. 귀로 들리는 소리를 완벽히 이해하게 되면 힘들긴 하겠지만 결코 외롭고 가치 없는 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 한다고 하잖아요? 어떤 난관에 부딪혔을 때 나름의 노하우로 그걸 극복하게 돼요. 당장 힘들더라도 ‘나는 지금 내 노년을 사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웃음)”
 
 
  -당신에게 중앙대란?
  “국악관 건물이 참 예뻤잖아요, 연습실에서 노래를 부르다 말고 문을 열고 그 앞의 푸릇한 잔디를 보는 걸 좋아했어요. 캠퍼스에 다양한 음악을 하는 아이들이 저마다의 소리를 내고 있고 제가 그중 하나라는 게 행복했어요. 성악 하는 친구들이 ‘워어어어~’ 하면서 지나가면 전 또 ‘어기야아~’ 하고 맞장구치고 그랬거든요.(웃음) 약간의 신경전이었다고 할 수 있죠. 친구들한테 걸어 다니는 오디오라고 불렸어요. 맨날 연습만 했지만 나름대로 참 좋은 추억이 많은 곳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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