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을 전공한 교수를 ‘경제학자’로 부르고 심리학을 전공한 교수를 ‘심리학자’로 부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철학을 전공한 교수를 ‘철학자’로 부르기에는 뭔가 개운치 않다. 이 개운치 못한 뒷맛은 철학에 대한 세상의 기대에서 비롯된다. 일단 이러한 기대의 정당함을 제쳐두고 보면 세상은 철학자에게 단순한 학자 이상의 좀 더 고결한 역할을 기대한다. 현실적인 이해관계나 욕망으로부터 초연하고 시대의 유행에 맞서 인간의 본래적 삶을 구현할 수 있는 지혜와 결단력을 갖춘 인물로서의 철학자가 그것이다. 그래서 자기 능력 밖에 놓인 이런 기대를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 철학교수의 삶은 고달프다. 물론 학문적 활동으로 국한시키지 않는다면 철학자의 길은 철학과(哲學科)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구현하려는 모든 인간에게 개방되어 있는 삶의 방식이다. 예컨대 배운 것이 없어서 특별한 기술 없이 평생 행상을 하면서도 그렇게 모은 소중한 재산을 고귀한 목적을 위해 기부하는 분이야말로 ‘철학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어느 정도 왜곡이 있을 수 있지만 최근 시민을 상대로 하는 철학 강좌의 인기는 높은 반면 강단철학의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이런 어려움은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며 ‘현실과의 밀당’을 소홀히 한 강단철학이 스스로 자초한 측면이 없지 않다. 철학은 시대와 연관해서 대체로 두 가지 대조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하나는 황혼녘에 날개를 펴는 ‘미네르바의 올빼미’라는 『법철학』에서의 헤겔의 비유처럼 철학은 시대(정신)를 자신의 사고 속에 담아내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헤겔의 관념론이나 과학을 자신의 사유모델로 삼고 있는 현대 분석철학은 모두 그 시대의 정점을 철학적 기초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다른 하나는 니체의 입장처럼 시대에 맞서는 반시대적 고찰로서 철학이다. ‘개미떼 같은 웅성거림’ 속에서 인간의 본래적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시대적 경향에 맞서 ‘시대의 제동기’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철학이다. 니체의 『즐거운 학문』에 나오는 밝은 대낮에 등불을 켜고 시장을 달려가며 “나는 신을 찾고 있노라!”라고 외치는 광인의 이야기는 신을 죽임으로써 자초한 위기를 자각하지 못하는 대중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그러나 너무 빨리 등장함으로써 사람들의 일반적 상식에서 수용되지 못하는 광인의 이미지는 오늘날 우리에게 적절하지 못하다. 세상이나 학문세계에서 철학은 정상적인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철학은 시대정신의 강점과 약점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여 새로운 전망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플라톤의 『파이돈』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가장 첨단과학적 사유로 무장한 피타고라스학파의 젊은 두 학도와 논쟁을 벌인다. 그는 먼저 상대방의 견해를 경청하고 그들의 오류를 스스로 깨닫게 만드는 귀류법(歸謬法)을 통해 그들의 생각을 끌어안는다. 그 다음 그는 인간의 삶에는 합리적으로 해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를 통해 그는 철학의 정신이 무지에 대한 자각, 즉 자기성찰이라고 설파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태도가 회의주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자기제한과 더불어 더 나은 해결책을 찾아 나선다는 점에서 과학적 정신도 대변한다는 사실이다.
 
  세상이 혼탁하면 그동안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철학에게 도대체 무엇하고 있는가라는 질책의 시선을 보낸다. 행여 그들이 세상의 모든 문제와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그런 철학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애초부터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다. 그런 철학은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선뜻 동의하기 어렵겠지만, 지금까지 철학은 시대적·사회적 변화 속에서 현실의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나름의 대안을 제시해왔다. 하지만 세상은 철학의 주장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비판만 한다고 외면한 것은 아닌가! 철학은 세상을 향해 참된 현실을 직시하라고 요구한다. 견디기 어려운 무더운 여름도 언젠가 가을이 다가올 것이라는 자연의 흐름 속에서 인내할 수 있는 것처럼 철학은 이미 다른 시작을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 한 학기에 걸쳐 생각, 비판, 정의, 행복, 사랑, 아름다움, 예술, 종교 등과 같은 철학적 주제들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를 전해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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