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객관식 문항은 정답과 오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맞다’와 ‘틀리다’로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 객관식 문항의 특징이다. 하나의 옳은 답을 찾아내지 못하면 그 문항은 틀린 것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4지 선다형에서 하나의 정답을 찾아내는 교육을 끊임없이 받았다. 그 덕분에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모든 것을 정답과 오답으로 구분하는 것에 매우 익숙하다. 대학 수능시험은 정답을 골라내는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 하나를 더 맞느냐 혹은 틀리느냐에 따라 대학의 당락이 결정되기 때문에 어쩌면 이런 습관은 당연할 수도 있다. 정답이 아닌 것은 모두 틀리다고 생각하고 나와 의견이 다른 이야기에 좀처럼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내 주장은 정답이고 나머지는 모두 틀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분법적인 사고로 편 가르기가 성행한다. 정치성향이 다르면 상대방이 주장하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일단 부정부터 한다. 보수와 진보로 구분하면서 중도파를 인정하기보다 그것을 꼭 중도우파, 중도좌파로 반드시 성향을 구분한다. 아무도 중간 조정자 역할을 하려고 나서지 않는다. 끝까지 너는 어느 편인가를 구분하고 줄을 세워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나이가 들면서 우리의 삶 속에 정답이 과연 얼마나 될까하는 의문이 자꾸만 든다. 과연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맞는 답과 틀린 답을 항상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 인간의 삶은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모범답안을 찾는 것인데 우리는 정답만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상황 1
  ‘태양의 후예’라는 드라마가 드라마에 대해서 무관심하였던 나마저도 본방사수를 하게 만들었다. 드라마 속의 남자주인공은 남자인 내가 봐도 정말 멋있었고 완벽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 자기의 연인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모습에서 부러움과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넋을 잃고 보았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뻔한 스토리의 진부성과 간접광고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그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런 수준 낮은 것을 보냐고 나무라기까지 한다. 그 드라마가 불법적이고 부도덕한 이야기였던가?
 
  상황 2
  어떤 핸드폰을 쓰냐고 물어봐서 특정 스마트폰을 쓴다고 하면 왜 그런 좋지 않은 핸드폰을 쓰냐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다. 생각지도 못한 비난에 그냥 사용하기 편해서 사용한다고 궁색한 답을 하면 그 상대방은 나에게 아무 생각 없이 산다고 핀잔을 한다. 나는 의문의 1패를 당했다.
 
  위의 상황에서 나는 틀린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생각, 성향, 가치관이 다른 것일 뿐인데 일부 사람들은 정답에 너무 익숙해져 ‘틀린 것’과 ‘다른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어떤 드라마를 보던, 어떤 신문을 보던, 어떤 정치성향을 보이던 그것은 틀림이 아니라 다름일 뿐이다. 이번 가을에는 틀림을 지적하기보다 다름을 이해하는 뉴스가 많았으면 좋겠다.
 
남영준 교수
문헌정보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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