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캠에도 몇 천명은 모일 수 있는 광장이 있었다. 그곳은 학생들이 여가와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쉼터였을 뿐만 아니라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터였다. 4.19혁명, 서울의 봄 등 학생운동에 참가한 중앙대 학생들은 모두 101관(영신관) 앞 중앙광장에서 모였다. 중앙광장은 가장 넓은 부지를 가졌을 뿐더러 캠퍼스의 정문에 위치하고 있어 가시성이 뛰어났다. 이번 중대신문은 중앙광장의 과거와 현재를 짚어보며 광장의 의미를 되새겨봤다. 또 전문가들에게 광장의 정치사회학적 의미에 대해 들어봤다.

▲ 학생들이 교내 집회를 마치고 교문을 나서는 모습.
 
넓은 잔디밭 위에서 구름처럼 모인 학생들, 요즘 서울캠 경관과는 많이 다른 모습입니다. 현재 101관(영신관) 앞 중앙광장부터 102관(약학대학 및 R&D센터)에 이르는 광장은 루이스 가든이라 불렸죠. 또 지금 310관(100주년기념관 및 경영경제관)이 들어선 자리에는 대운동장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광장들은 60~80년대 한국 사회 격동기를 지내며 학생들에게 구심점의 역할을 했죠.
 
▲ 4·19혁명 당시 중앙대 학생 천여 명은 대운동장에 모여 선언문을 채택했다.
 
  중앙대의 광장은 학생운동의 근거지였습니다. 4·19혁명도 중앙대의 경우 영신관 앞 광장을 중심으로 이뤄졌죠. 당시엔 루이스 가든이 조성되지 않아 영신관 앞은 넓은 공터였습니다. 그곳에 모인 약 1천여 명의 학생은 선언문을 채택하고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플래카드를 내걸며 거리 시위에 나섰죠. 이외에도 64년 당시엔 한일 외교 정상화에 대해 약 2천여 명의 학생들이 성토대회를 가지는 등 영신관 앞은 항상 학생들로 북적였습니다.
 
  80년대에 이르러 영신관 앞 대운동장은 녹지화 되면서 루이스 가든이라는 이름으로 재단장됐습니다. 각종 목초가 심어져 있던 루이스 가든은 학생운동을 위해 사용됐죠. 80년에는 정부의 계엄령의 즉각적인 철폐를 요구하는 시국 성토대회가 다시 열렸습니다. 이날 대회에선 약 4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참가해 열띤 토론을 벌였죠.
 
▲ 85년 10월 11일에 있었던 의혈대동제 행사 중 차전놀이 모습.
 
  대운동장과 루이스가든 등에선 비단 학생운동뿐만이 아니라 의혈대동제, 단대별 행사 등 각종 축제까지 이뤄졌습니다. 85년도 총학생회 부활 이후 처음 진행된 의혈대동제는 교내 대운동장에서 진행됐습니다. 지난날에는 학생운동을 위한 행사였지만 이날을 기점으로 ‘축제’라고 할 수 있을 만한 학내 행사가 생겨난 것이죠. 이날 행사에서는 1개월가량 학생들이 준비한 단대대항 고싸움과 함께 외부 가수 초청 공연도 진행됐습니다. 그날의 광장은 가히 학생들의 삶의 터전이었다고 부를 수 있을 듯합니다. 캠퍼스를 차지하는 면적만큼이나 광장은 학생활동에 있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 78년 10월 개교 60주년을 기념해 ‘한강축전’이 대운동장에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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