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혜영 선교사(간호학과 88학번) - 중대신문
최종편집 : 2017.10.12 목 11:42
인터뷰중대신문이 만난 사람
권혜영 선교사(간호학과 88학번)사랑에 대하여
임지원 기자  |  jela04089@cau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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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9.04  15:3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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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명의 아이들이 있어요. 가슴으로 낳은 제 자식들이요.” 킴벌리, 레슬리, 다니엘과 노에, 사라…. 온두라스의 아이들에겐 두 명의 엄마가 있다. 자신을 낳아준 엄마, 그리고 권혜영 선교사다. 지난 20년간 온두라스의 매춘 여성들과 아이들을 위해 홀로 싸워온 그녀는 진정한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삶은 봉사, 그 자체였다. 수년 만에 한국에 귀국한 그녀를 어렵게 만났다. 
   
 

 


어둠의 거리로 뛰어든
백의의 천사

 
조건 없는 사랑으로
마음을 치료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저 너무 괴로워요. 자꾸 그 아이들의 눈망울이 아른거려 미치겠습니다.” 권혜영 간호사는 결국 사직서를 내밀었다. 중앙대 필동병원 신생아실에서 근무하던 그녀는 단지 아이들을 사랑한 ‘천상 간호사’였을 뿐.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던 그녀가 간호직을 내려놓고 대뜸 봉사의 길에 뛰어든 것은, 주변사람들로선 상당한 충격이었다. “네가?”
 
 
 
  -왜 갑자기 사직을 결심했나.
  “94년 어느 날 조선일보에 대문짝만한 광고가 실렸어요. 아프리카의 부족전쟁 때문에 난민이 많이 발생해서 간호사, 약사, 조산사 등 자원봉사자가 필요하다는 광고였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두 달간 그곳에 의료봉사를 다녀왔어요. 전쟁은 참혹했죠. 엄마들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아이들의 시체를 끌어안고 넋이 나갔어요.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울음도 나오지 않은 채 공황상태가 온 거예요. 그런데 그 와중에 아이들만은 너무 밝았어요. 아카펠라를 불며 폐허가 된 벌판 위에서 전쟁이 끝나길 바라는 진심 어린 기도를 드리고….”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나.
  “맞아요. 봉사를 마치고 둘러앉아 마지막 송별회를 하는데 그 아이들의 똘똘하고 깊은 눈과 마주쳐버렸어요.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죠. 순간 많은 후회와 슬픔의 감정이 소용돌이쳤어요. ‘이렇게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이 많은데 난 정말 우리나라에서 편하게 살았구나’라고요. 바로 결심이 섰어요. 앞으로는 나를 위해서가 아닌, 이 아이들을 위해 살겠다고.”

  -쉽지 않은 결정이다.
  “저도 놀랐어요. 전 정말 ‘집-학교-교회’만 왔다갔다한 사람이었거든요. 성격도 내성적이라 여행 한번 가지 못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두려워했었죠. 사실 아프리카에 의료봉사를 간 것 자체도 기적이에요.(웃음) 주변 사람들은 저를 말리기도 하고 자격에 의문을 가지기도 했죠. 하지만 확신을 하고 돌아왔어요. ‘난 기필코 이들을 돕겠다’라고요.”

  -원래 간호사였는데, 적성에 맞지 않은 것인지.
  “아니요, 사람들은 제가 평생 간호사를 할거라고 생각했대요. 워낙 아이들을 좋아해서 신생아실에 있을 때 양팔 가득 아이들을 끌어안고 쪽쪽 거리며 근무했거든요. 그런데 한번 마음의 결심이 서는 순간, 그렇게 좋아하던 일도 가시방석이 돼버리더라고요. 도저히 안 되겠어서 그길로 병원을 나왔죠.”
 
 
  선교사의 길은 험난했다. 비행깃값, 생활비 등 모든 자금을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여차여차 힘들게 후원자를 모집해 정말 떠나려고 하는 순간, 생각지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그 시점에 아프리카로 가는 모든 경로가 막혀버린 것이다. 선교가 허용된 지역은 오직 한 곳만 남은 상태. 들어본 적도, 찾아도 나오지 않는 ‘온두라스’라는 나라였다. 몇 달 기다려봤지만 여전히 온두라스만 여석이 열려 있었고, 결국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1996년, 온두라스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온두라스는 굉장히 생소하다.
“20년 전엔 더 생소했어요. 온두라스에 대한 서적과 자료를 찾아보려는데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어떤 나라인지, 어떤 사람들이 사는 곳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무작정 출국했어요. 하지만 기대 그 이상이었죠. 상상을 초월하는 나라였어요.”

  -상상을 초월한다니.
  “당시 생활환경이 굉장히 심각했어요. 대다수 빈민은 칸도 나뉘지 않은 흙집에서 일가족이 생활하고 저녁으로 옥수수 반죽에 소금을 쳐 먹는 게 다예요. 그러니 아이들 영양 상태가 최악이죠. 심지어 물에 석회질이 많아 콜라를 대신 마시는데 갓 태어난 영아에게도 콜라를 먹이는 걸 봤어요. 콜라를 계속 먹다 보니 이가 상하는데 치료받을 돈이 없어서 그냥 뽑아버려요. 40대가 넘으면 모두 틀니를 꼈죠.”
 
   
 
-상황이 심각하다.
  “그래서 가자마자 보건교육부터 했어요. 매일 산 넘고 바다 넘어 시골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온도 재고 영양 상태 체크하고 교육하고. 그때 당시엔 영상 실조에 걸린 아이들이 많았거든요.”
 

  -계속 보건교육을 이어왔나.
  “아뇨, 98년도에 큰 허리케인이 왔었어요. 이 때문에 전국이 초토화됐죠. 정부에서 피난 가라고 공지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미련하게 집을 지켜야 하는 거에요. 왜냐면 집을 떠나는 순간 ‘갱’에게 모든 재산을 털리거든요. 결국 밀려들어오는 태풍우에 꼼짝없이 다 떠내려갔어요, 모조리. 그나마 남은 사람들은 지붕 위에 올라가서 살려달라고 절규하고…. 보건교육은 잠시 접어두고 응급구호를 다니느라 바빴죠.”
 
  -무서우리만치 참혹하다.
  “응급구호를 다니다가 저 멀리 나무 위에 어떤 형체가 보이는 거예요, 자세히 보니 가득 차오른 물 때문에 엄마와 아이들이 나무에 매달려 있었죠. 알고 보니 원래 보건교육을 다니던 시골 마을 사람들이었어요. 가슴이 정말 찢어질 듯 아팠죠. 이후에는 구조된 사람들에게 물과 식량, 여분의 옷을 바리바리 나눠주며 사태를 수습했어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재해였죠.”
 
 
  보건교육과 응급구호를 다니던 첫 3년이 지났다. 이제는 어떤 사역을 할까, 고민하는 그녀에게 동료 선교사가 매춘 여성을 위한 선교를 제안했다. 매춘 여성이라니. 거부감이 확 밀려왔다. 그러나 그녀의 눈을 가린 것은 다름 아닌 편견이었다. 동료 선교사의 제안에 마지못해 매춘지역으로 떠난 그녀는 그곳에서 한없이 부족한 자신을 발견한다.
 
 
  -매춘 거리를 다녀왔나.
  “네. 그곳은 충격 그 자체였어요. 옷가게에 옷 걸려있듯이 여성들이 상품처럼 진열돼 있었죠. 차마 눈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겠어서 바닥만 보고 걸었어요. 그러다 어느 가게의 한 라틴계 여자에게 왜 이곳에 있냐고 물었죠.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 그 여자의 사연을 듣는데, 그들에게 편견이 있던 제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졌어요.”

  -어떤 사연이었나.
  “비단 그 여자뿐 아니라 많은 매춘 여성들의 이야기예요. 그녀는 고향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죠. 어느 날 호감형의 잘생긴 남자들이 와서 일자리를 주선해 주겠다고 하기 전까지요. 그들은 그녀를 속여서 온두라스로 데려왔고, 비행깃값과 식비 등의 명목으로 매춘을 강요했어요. 빚을 갚기 전까진 나가지 못한다고요. 언어도, 법도 모르니 속절없이 당한 거죠. 쥐꼬리만큼 남는 돈을 고향 가족들에게 부쳐 주니 저항하지도 못한 채로요.”

  -안타까운 이야기다.
  “한없이 맑은 영혼의 여자, 우리와 같은 인간일 뿐이에요. 그들에 대해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게 정말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제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이 여인들을 위해서 일해야겠다고 다짐했죠.”

  -매춘 여성들을 위한 사역은 어떻게 했나.
  “토요일마다 도심의 매춘여성들에게 내려갔어요. 나오고 싶지만 사후대책이 없는 여성들을 모아 재봉을 가르쳤죠. 쉽지 않았어요. 대부분이 마약 중독자였고 이미 향락에 찌들어있었거든요. 실망도 많이 했죠. 하지만 그들과의 교류가 늘어날수록 이곳 온두라스 밑바닥의 깊이를 실감할 수 있게 됐어요. 한없이 깊고, 어둡고, 슬픈 밑바닥이요.”

  -어땠나, 얼마나 깊었는지.
  “과장 좀 섞어서 남성의 반이 ‘갱스터’고, 소위 조직 폭력배에 가담하고 있으며 여성의 반이 매춘을 해요. 절도와 강도가 아주 자연스럽죠. 청부살인도 10여만 원이면 가능해요. 살인율 1위 나라답게 당장 옆에서 누군가가 죽어 나가도 이상할 게 없는 곳이에요. 의식 수준은 더해요. 예전 우리나라에서 축첩제가 있었듯이 이곳에서도 남자가 여러 여자를 거느리고 바꿔치기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요. 여성은 동물만도 못한, 단지 하녀일 뿐이에요. 지금은 그래도 많이 계몽됐다지만 당시엔 정말 심각한 수준이었죠”
 
  -잘 상상이 안 간다.
  “온두라스 사람들을 치킨을 정말 좋아해요. 그런데 그 닭은 성장촉진 호르몬제를 투여해 키운 닭이에요. 그걸 먹고 자란 아이들은 어떻게 되겠어요. 여자아이들은 7살부터 발육이 두드러지고 9살이 되면 초경을 해요. 그리고 10살짜리가 애를 낳죠. 의붓아버지건, 삼촌이건, 사촌이건, 친오빠건 주위 사람들이 다 건드리는 거예요. 노리개처럼.”

  -정말 말도 안 된다.
  “사실이에요. 그런데 여기, 카톨릭 국가거든요. 임신중절을 허용하지 않죠. 낳아야 해요. 그런데 어떻게 10살짜리가 정상적으로 애를 낳겠어요. 10살짜리 애의 배를 갈라 애를 꺼내는 겁니다. 콘돔을 살 돈은 없으니 생기는 족족 낳는 거죠. 그렇게 엄마는 엄마대로 계속 애를 낳고 옆에서 애가 또 애를 낳아요. 그렇게 한집에 스물다섯 명도 같이 살더라고요. 엄마가 낳은 애랑 애가 낳은 애랑 나이가 같은 경우도 비일비재해요. 그냥 애 낳는 기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말 여성의 인권은 바닥이었고 단순히 상품가치로만 여겨졌어요.”
 
 
  “이곳에선 하루에 매춘으로 몇 백씩 벌어도 마약과 술에 모두 탕진해버리죠. 내 아이를 위해서는 절대 돈을 쓰지 않아요. 아이들보다 지금 현재 자신의 애인이 더 중요하죠. 아이들은 굶길지언정 애인은 먹여 살려요. 그런데 이 애인이란 사람은 이 여자의 아이들을 성폭행하는 거예요. 의붓아버지가 있다 하면 당할 확률이 99%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성 인권이 굉장히 심각해요.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아, 아이들을 먼저 보호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들은 인간이고,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해요. 계몽이 시급했죠. 그래서 이들 매춘 여성들과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여리고센터’를 건립했어요. 하지만 엄마들은 아이들을 이곳에 버리고 도망가더군요. 짐짝이니까. 결국 아이들만 모아서 교육을 하기로 했죠.”
 
   
▲여리고 센터
 
  -여리고센터엔 어떤 아이들이 모였나.
  “거리에서 방황하던 아이들, 집에서 쫓겨난 아이들 등 다양하지만 모두 성적으로 유린당한 아이들이에요. 처음에 열두 명이 모였는데, 모두 상태가 정말 안 좋았어요. 마음이 죽은 상태였죠. 도무지 마음을 열지 않았고 과거의 고통스런 잔상에 자다가도 몸서리쳤어요.”

  -어떤 일을 겪었길래.
  “킴벌리라는 아이가 있어요. 7살에 엄마가 죽자 친아빠가 킴벌리를 성적으로 유린하기 시작했죠. 그러다 11살 때 친아빠의 아이를 낳았어요. 제왕절개로. 정상적으로 낳은 아이가 아니다 보니까 갓난아기도 두 달 만에 죽고, 거리를 떠돌다 이곳에 들어오게 됐어요. 레슬리는 의붓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했어요. 그런데 엄마한테 이 사실을 이야기하자 엄마는 ‘이 창녀 같은 것이 내 남자를 꼬셨다’고 레슬리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학대했죠.”

  -(…)
  “레슬리를 처음 만났을 때 생일선물로 뭘 받고 싶냐고 물었어요. 뭐라는지 아세요, 레슬리의 소원은 내년 생일이 오기 전에 죽는 거래요. 그럴 정도로 마음이 죽어버린 거예요.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주고 보호해주고 아껴줘야 할 사람들에게서 엄청난 배신을 당하고 버려지고 나니 살 의욕이 아예 생기질 않는 거죠.”

  -너무나도 화가 난다.
  “이외에도 사촌 형들에게 지속적으로 성폭행을 당한 다니엘과 노에 형제 등 다들 저마다의 사연과 상처를 가지고 왔어요. 아이들에겐 엄마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데, 이 친구들에겐 더 이상 ‘엄마’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엄마가 돼줘야겠다고 생각했죠.”

  -엄마가 된다니.
  “아이들에게 물었어요. 내가 너희의 엄마가 되어도 되겠냐고, 내게 너희의 또 다른 엄마가 될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지 않겠냐고요. 정말 제가 낳은 아이들인 양, 가슴으로 연결된 것처럼 이 아이들이 힘들면 제 몸도 아프더라고요.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 몇 년간 생활하며 보듬어주고, 사랑을 줬어요.”

  -감동적이다. 아이들의 상처는 잘 치유가 됐나.
  “1년이 지나서야 마음을 열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자신이 당한 아픈 상처도 하나하나 열기 시작했죠. 이 아이들의 상처는, 정말로, 깊었어요. 이 아이들의 부모라는 작자들에게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일었죠.”

  -그래도 아이들이 안정을 찾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죠. 닫혀버린 마음을 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한번 아이들의 마음이 열리고 살아나니, 지금은 언제 그런 과거가 있었냐는 듯 해맑고 순수하게 지내고 있어요. 도리어 자신의 상처를 오픈하고 다른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려 하더라고요, 얘네들이. 너무 예쁘고 한없이 예쁜 제 아이들이죠.(웃음)”
 
  -대견하다.
  “사랑을 받은 아이들이 사랑을 주게 되죠. 이 나라가 바뀌려면 우선 가정이 제대로 서야 하고, 그러려면 아이들부터 교육시켜야 해요. 그래서 전 아이들한테 항상 이야기해요. ‘얘들아, 엄마가 너네한테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희들이 정상적인 가정을 꾸려서 행복하게 사는 게 엄마가 유일하게 바라는 거다. 사랑이 가득한 가정을.’

  -아이들에겐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
  “아이들은 자기가 어떤 물건을 받았는지는 기억 못 해요. 그런데 자신을 사랑해주고 안아준 사람은 반드시 기억하더라고요. 가장 중요한 건 사랑밖에 없어요. 교육도, 공부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에겐 사랑밖에 없어요, 정말.”
 
 
  온두라스에서의 20년이 지났다. 너무 무리한 것일까, 완전히 탈진해 귀국한 권혜영 선교사의 몸은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랑으로 가득 찬 그녀의 마음속엔 아이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그녀의 사랑은 열두 명, 아니, 온두라스 전체에 퍼져나가 또 다른 사랑을 품고 있다. 앞으로도 영원히 웃어야 할 이 땅의 아이들을 위하여.
 
   
권혜영 선교사와 여리고센터의 아이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장소는 여리고센터가 있는 소나무숲. 희망을 찾은 아이들의 얼굴엔 더이상 그늘이 없다.
 
당신에게 중앙대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소중한 공간이에요. 당시 대학교회에서 많은 사람과 많은 추억을 쌓았죠. 지금 이렇게 행복할 수 있었던 것도 간호사가 되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고 모두 중앙대 간호학과에서 공부한 덕분이에요. 아직도 그 시절 함께 사랑을 나눈 동기들과 자매들을 만나면 우스갯소리로 그 시절이 호시절이었다고들 하죠.(웃음) 그러니 여러분들도 행복하게, 대학생활을 즐기세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들어 놓은 소중한 추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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